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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2007 한국도로공사 에베레스트 로체 원정대'가 현지에서 써내려간 기록이다. 원정대(대장 박상수)는 3월 28일 한국을 떠났으며, 4월 9일경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 뒤 '에베레스트' 등반대와 '로체' 등반대로 나뉘어, 4월 11일경 동시에 등반을 시작했다. 원정대는 지난 5월 4일 로체봉 정상 등정에 성공했으며, 16일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까지 마쳤다. 이 원정대에는 지난 90년 맥킨리 단독등정에서 사고를 당해 열 손가락을 잃은 김홍빈씨가 부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 원정대는 5월 31일 귀국했다. <편집자주>
▲ 칼라파타르에서 본 에베레스트.
ⓒ 김창호
드디어 하산이다. 그동안 두 달 여 머물던 자리라 아쉬움도 있다. 지긋지긋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고 싶을 줄 알았는데. 텐트를 쳤던 자리는 빙하바닥이 녹아서 움푹 패여 있다. 날씨는 완연히 따뜻하다. 아이스폴의 지형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베이스캠프를 떠나는데 그사이 알고 지냈던 이웃사촌들이 아는 체한다. 의무실 의사, 영국 방송팀, 말레이시아 원정대 등등. 하여튼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베이스캠프에는 우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른 이후 거의 매일 오전 중에는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많은 원정대가 성공했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 한국 실버원정대의 등정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같은 한국원정대여서가 아니라 우리 실버원정대의 등정은 곁에서 본 바로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수없이 아이스폴과 베이스캠프와 딩보체 사이 고도격차 1000m를 오가며 적응 훈련을 하시던 어르신들이 하도 안쓰러워서 처음에는 '저 어른들 저러다가 큰일 나는 것 아닌가' 걱정했었다. 심지어 '본인들은 포기하기 어려울 터이니 나라도 나서서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등정에 성공한 실버 원정대원들은 하산 길에 루크라에서 만났다. 큰 축하인사를 드렸다.

저 어르신들,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러나 성공

우리 원정대에서는 박 대장과 왕추가 하루 먼저 내려갔다. 동시에 머물던 텐트도 하나둘씩 걷히고. 우리는 몇이서 따로 고쿄 피크(5360m)로 돌아서 하산하기로 했다. 고쿄 피크는 넓은 코발트 빛 빙하호수와 정상에서 에베레스트 초오유봉 등을 조망할 수 있는 환상적인 풍경을 뽐내는 곳이다.

올라온 길을 바로 내려가는 것보다 약 이틀 정도가 더 걸리는 여정이다. 내려오는 길에 빈 야크들이 수없이 올라온다. 각국 원정대의 하행 캐러번 짐을 실러 오는 행렬이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의 하산 시즌이 왔음을 말해준다.

고쿄피크로 가기 위해서는 고락셉 로부체를 거쳐서 촐라파스(5330m)라는 큰 재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았다. 오르는 데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700~800m를 내려갔다가 다시 베이스캠프만한 높이로 올라서 재를 넘고 급경사 암벽구간을 지나 또 베이스캠프 높이만큼 오르는 곳이 고쿄피크다. 로추체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하루 종일 걸었다. 말이 고개이지 고개가 눈 속에 쌓여서 30여분을 크레바스까지 비끼며 눈길을 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밭 급경사 내리막과 암석구간을 지나 몇 개 능선을 오르내리니 타낙 로지가 나온다.

▲ 힐러리 스텝을 오르는 클라이머들.
ⓒ 김창호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에 도착한 강행군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 더욱 힘들고 무서웠다. 타낙 로지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와 빙하지대를 지나서 고쿄에 도착하니 점심때. 여유 있게 여장을 풀고 로지 주인네 야크 똥 말린 것이 비에 젖을 새라 비설겆이도 도우면서 빙하호수의 풍광을 즐겼다.

다음날 아침안개를 뚫고 고쿄피크에 올랐다. 오후에 돌레(4130m)까지 내려와 잤다. 내려오는 길에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무숲이 나타난다. 나무야 반갑다. 얼마만이냐. 아 나무와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4000m 산허리를 돌아 돌아 만들어진 길을 타고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겁이 난다. 이 길에 익숙한 포터는 쏜살갈이 내달린다. 애써 천 길 낭떨어지 쪽에서 눈길을 피하면서 내려왔다.

마지막 오르막, 기도를 하니 쉬워졌다

다음날이 남체에서 우리 대원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여유롭게 하산하는 데 급경사 오르막이 또 나온다. 아마 이번 원정에서 마지막 오르막일 것 같다. 죽어라고 올랐다.

이번 원정에서 발견한 버릇 하나. 힘든 오르막에서 남을 위해 기도를 하면 놀랍게도 걸음걸이가 쉬워지더라는 것. 이번 오르막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한 걸음마다 기도를 했다. 그리고 올라보니 아마 다블람(6856m) 봉이 멀리서 반긴다. 올라갈 때 참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봉우리다. 어머니의 목걸이라는 이름답게 묘한 기품을 풍긴다.

탕보체(3860m) 분기탱가(3250m) 등 우리가 올라가던 길들이 보인다. 삼거리에서 김창호 윤중현 대원을 만났다. 며칠만이지만 반갑다. 같이 쿰중(3780m)에 들러서 구경했다. 산중에 이렇게 큰 촌락이 있을 줄이야. 면소재지만 했다. 힐러리 스쿨을 보고 생보체 공항을 지나 남체(3440m)에 도착했다. 하루 10달러짜리 호텔에서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남체의 비좁은 골목길 구석구석 눈에 익다.

한 허름한 집에서 토종닭 튀김을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아침 하산했다. 남체에서 하산하는 길가에는 이미 녹음이 우거지고 보리가 노랗게 익어 있다. 두 달만의 변화가 느껴진다. 베이스캠프의 황량한 돌밭과 빙하일색의 환경과는 완전히 다른 숲이다. 올라올 때 설레임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었던 협곡과 산들이 이젠 정겹게 다가온다. 카투만두행 경비행기장이 있는 루클라(2840m)에 오후 늦게 도착했다.

ⓒ 김창호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를 탔다. 먼저 내려갔던 박 대장 일행은 날씨가 안 좋아 사흘을 이곳에서 기다렸단다. 이륙하고 30분만에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원정 도중에 응급환자 이석희를 태우고 헬기로 올 때는 한 시간이 걸렸었다. 당시 헬기에서는 한 시간 내내 헬기가 금방이라도 높은 산등성이와 부딪힐 것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경비행기 밖으로 그 멋있는 설산이 펼쳐진다. 눈이 가질 않는다. 몇 달이 지나야 아쉬워진단다.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5월 26일이다. 베이스캠프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일주일만이고 전체원정대 일정으로는 두 달만이다. 우리 원정대는 세르파와 주방요원들에게 임금을 주고 송별회도 가졌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봉에 오른 세르파에게는 보너스도 주었다.

두 봉우리를 다 오른 유명 세르파 밍마는 로체봉 보너스를 중도에 하산한 한 세르파에게 양보했다. 그들에게는 꽤 큰 돈인데. 23세의 나이치고는 통이 큰 세르파다. 진작부터 눈에 들어왔던 녀석인데 '역시 내 눈이 정확했어' 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돈 아껴라, 도박하지 마라, 술 먹지 마라'고 아버지같이 신신당부를 했다.

이들 세르파들은 카투만두 공항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이석희 대원의 맹장수술을 맡았던 카투만두 옴병원의 담당의사를 한국식당으로 초대해서 소주 한잔 대접하고 나니 모든 일을 다 마무리한 것 같다. 이제는 귀국이다.

맞다, 김홍빈이 장애인이었지

귀국행 비행기. 김홍빈과 나란히 앉았다. 왼편에 김홍빈 오른편에 김미곤. 김미곤은 아예 담요를 뒤집어쓰고 잔다. 기내식이 나왔다. 나는 늦은 점심이어서 허기를 떼우느라 옆자리 김홍빈을 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김홍빈은 비닐봉지 속 포크세트를 열지 못했다. 요쿠르트 밀봉을 따지 못했다. 망설이는 태도에 놀라 쳐다보고야 그것을 눈치 챘다. 아, 그가 열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이지. 재빨리 터주었다. 매우 손쉬운 일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마음 씀씀이가 필요했다. 김홍빈과 함께 있다 보면 종종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착 무전기도 잡지 못한 탈진한 상태로 베이스캠프와 무전 중인 김홍빈 대원.
ⓒ 김창호
그가 에베레스트에 오른 순간 환호하고 감격했다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새삼스럽게 다가온 사실 확인이다. 그가 왜 엉금엉금 기어서 정상에 서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울먹였던지. 그가 왜 베이스캠프로 귀환하는 날 대원들을 부둥켜안고 '변변치 못한 사람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대성통곡을 했던지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귀국하고 며칠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 온 김홍빈은 오늘도 그 뭉툭한 손으로 혼자의 아침밥을 챙기고 있을 것인데. 혹시 세르파가 붙어서 일거수 일투족을 도와주던 설산의 나날을 벌써부터 추억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 문을 나서며 받은 꽃다발은 색깔이 노랗고 화사했다. 향기나 눈으로 보는 꽃을 늘 상대하다가 꽃다발을 목에 걸고 보니 피부로 느끼는 꽃의 감촉이 좋았다. 공항에서 그렇게 환대를 받을 줄 몰랐다. 가족은 차치하고라도 한국도로공사 임직원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TV카메라가 우리를 기다리는 데서 '아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김홍빈을 보면서 장애인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아름다운 동행과정이 영화처럼 스쳐간다. 사실 이번 원정은 김홍빈과의 동행이어서 아름다웠다. 더욱이 그가 성공을 해주어서 더욱 개운하다.

덧붙이는 글 | 귀국해서 오마이뉴스에 올라간 저의 글을  읽어보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현지의 여러 사정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었습니다. 그동안 원정대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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