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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스캠프로 이동중인 대원들
ⓒ 이평수

4월 8일 일요일 오전 맑음, 오후 바람, 구름
페리체(Pheriche, 4280m) ⇒ 로부제(Lobuche, 4910m)

어제 내린 눈 덕에 페리체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온통 하얗게 물든 페리체는 흡사 엷은 빛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아침으로 구운 식빵 두 조각과 삶은 계란 두 개로 배를 채우고 로부제로 향했다.

윤종철 대원의 상태는 다소 나아진 듯했으나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투글라(Tuglha, 4620m)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윤 대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삶은 감자로 혼자만의 점심을 해결했다.

갓 삶은 감자가 다 식어갈 무렴 윤종철 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윤 대원은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윤 대원은 투글라에서 하루 밤을 더 묵기로 하고 혼자만 로부제로 향했다.

저 멀리 로부제의 롯지가 보일 무렵 7년 전 나와 함께 등반을 하다가 눈사태로 사망한 펨바겔젠 셀파의 노부를 만났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자 두 손 모아 합장하고 나를 안아주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람이 무지 미울 수도 있을 텐데….

이들은 두 마리의 야윈 야크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나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등반 마치고 하산하는 길에 꼭 자기네 집에 들르라고 한다. 그러겠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그는 또 다시 내게 합장하고 뒤돌아서 연신 야크 허벅지를 내리치며 하산 길을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건만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를 않았다.

오후 4시경 로부제에 도착했다. 괜찮은 롯지는 이미 많은 원정대와 트레커들이 차지하고 없었다.

어렵게 방 하나를 구해 들어서자 어떤 역한 냄새 때문에 침대에 눕기가 망설여진다. 배낭만 침대 머리맡에 두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빵 두 조각에 쨈을 발라 저녁 흉내만 내고 야크의 똥으로 불을 피운 난로가에 앉아 밤이 깊어가기만을 기다렸다.

밤 10시,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각자의 방으로 찾아들고 부산하던 식당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한 늙은 가이드가 먹다 남은 싸구려 위스키를 들고 내 곁에 와 앉더니 내게 위스키 한 잔을 건넨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한 잔 받아 마셨다. 독한 술, 따뜻한 난로 탓인지 금방 취기가 돌았다. 자정이 다 되어갈 때까지 우리 둘은 수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25년 전 그가 이 곳을 트레킹 가이드 할 땐 롯지도 없었다고 한다. 밤이면 텐트를 치고, 땔감은 남체로부터 가져와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곤 했단다.

연신 내뱉는 그의 무용담에서 그의 인생이 물씬 묻어나는 것 같다. 난로의 온기가 식어갈 무렵, 그도 이제 취기가 도는지 그만 일어서야겠다고 한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찾아들어 잠을 청했다.

4월 9일 월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로부제(Lobuche, 4910m) ⇒ 고락셉(Gorak Shep, 5110m)

오전 7시, 역시 빵 두 조각과 삶은 계란 두 개로 아침을 때우고 고락셉을 향해 길을 나섰다. 길은 평탄해서 걷기 좋았지만 해발 5000m가 넘는 고소여서인지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가빠왔다.

저 멀리 눕체봉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있는데 누군가가 반가이 인사를 건네 왔다. 며칠 전 팍딩에서, 남체에서 만난, 한국에 대해 무척 호기심이 많은 미국인 친구였다.

그는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 적더니 내게 건네주며 등정에 성공하면 소식 좀 알려달라고 한다. 뭐냐고 물었더니 이메일 주소라고 한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남마스테(namaste)!" 인사를 건네고 로부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덕에 올라서자 저기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박상수 대장이 언덕 아래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틀만에 다시 보는 모습이지만 무척이나 반갑다. 박 대장, 황일석 대원, 김석원 카메라 감독, 박종수 대원, 이채성 대원은 고락셉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베이스캠프로 갔다고 한다.

카트만두로 후송된 이석희 대원은 급성맹장으로 카트만두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끝까지 맹장은 아니길 바랐는데….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등반을 할 수 없을게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인 것 같다. 괜찮은 음식과 썩 나쁘지 않은 방, 유럽 트레커들이 많아서인지 메뉴 역시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게 갖춰져 있었다. 특히 애플파이와 샌드위치는 먹을 만 하다.

모두들 고소 때문인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밤이면 잠자는 것 외엔 딱히 할 만한 소일거리가 없다. 전등불이 없는 탓에 더욱 더 그러하리라….

4월 10일 화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고락셉(Gorak Shep, 5110m) ⇒ 베이스캠프(Base Camp, 5364m)

오전 6시, 트레커들의 분주한 소리에 잠을 깼다. 바깥 공기가 찬 탓에 침낭에서 나오기가 싫다. 어젯밤 미리 주문한 샌드위치로 아침 식사를 하고 베이스켐프로 향했다.

모두들 힘든 모양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조금만 걷다 뒤돌아보면 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약 3시간의 고행 끝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는 이미 많은 원정대의 텐트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어제 먼저 도착한 대원들과 셀파들이 이미 베이스캠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 점심은 한국에서 공수해온 라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한국의 맛이다.

점심 식사 후 모두들 바빠지기 시작했다. 12일로 예정되어 있던 방문단의 일정이 하루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모두들 베이스캠프를 정리하고, 헬기에 의한 급격한 고도상승으로 인하여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고산병에 대비해 산소장비도 점검하고, 셀파들은 내일이 길일이라며 라마제를 지내겠다며 부산을 피운다.

저녁은 한국에서 가져온 고등어와 갈치구이. 이제야 고향에 온 기분이 든다. 원정대원들에게 베이스캠프란 고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일 방문단을 맞아야 하므로 일찍이 각자의 텐트로 찾아들었다.

4월 11일 수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오전 6시에 일어나 일찌감치 아침식사를 하고 방문단을 맞을 준비를 했다. 셀파들은 라마제에 올릴 음식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대원들은 산소장비를 챙겨 방문단이 타고 올 헬기의 안전한 착륙을 위해 착륙장을 정비했다.

오전 9시 30분경 저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린다. 모두들 상기된 모습으로 헬기를 바라본다. 헬기는 베이스캠프를 한 바퀴 선회하더니 4평 남짓한 착륙장에 정확하게 착륙한다. 급히 방문단과 짐을 내리고 계곡 저편으로 사라진다.

한국도로공사 사장님, 노조위원장 이하 방문단의 모습은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 않다. 어쩌면 베이스캠프를 헬기로 온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일지도 모른다. 급격한 기압의 하락과 산소 부족으로 인한 급성고산병으로 위독한 상황으로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헬기 착륙장으로부터 베이스캠프까지는 20분 남짓한 거리이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방문단 일행은 라마제에 동참을 했다. 셀파들이 산을 오르기 전 치르는 신성한 의식이다. 셀파들은 이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 전에는 절대로 등반을 하지 않는다.

라마제가 끝나기도 전에 헬기가 베이스캠프로 다시 찾아와 방문단 일행을 기다린다. 방문단을 기다리다 말고 헬기는 두 번이나 베이스캠프 상공을 선회한다. 바람 때문에 그 조그마한 착륙장에 오래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라마제가 끝나기 무섭게 헬기 착륙장으로 향했다. 잠시 머물렀지만 방문단 일행의 상태는 많이 나빠졌다. 간간히 산소를 마시고 모두들 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헬기 착륙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헬기 파일럿이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잘 가란, 잘 있으란 인사도 나눌 새 없이 방문단 일행이 헬기에 오르기 무섭게 헬기는 황급히 계곡 아래로 사라지고 만다.

영국 등산가 말로리가 그랬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우연 결에 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방문단 일행이 떠난 베이스캠프는 왠지 허전함이 감돈다. 무엇 때문일까?

오후 늦게 이석희 대원의 보호자로 카트만두로 하산했다가 방문단 일행과 함께 베이스캠프로 되돌아왔던 이평수 대원은 급격한 고도상승으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고락셉으로 다시 하산한다. 밤새 눈사태 소리가 베이스캠프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4월 12일 목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및 바람

새벽 5시, 싸누와 옹추 셀파가 캠프1을 구축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나머지 세 명의 셀파와 대원들은 이틀을 더 휴식한 후 캠프1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눈사태 소리….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 하루 빨리 등반을 끝내고 귀국하고 싶다. 이제 갓 돌 지난 둘째 녀석도 보고 싶고, 따뜻한 한국의 봄기운도 무척 그립다.

4월 13일 금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및 바람

카트만두를 떠난 지 처음으로 머리를 감았다. 처음으로 면도도 했다. 정말이지 기분이 날아갈 듯 가뿐하다. 저녁엔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를 찾은 한국원정대 대장을 초청하여 만찬을 함께 했다. 모두들 소중한 인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4월 14일 토요일 오전 맑음, 오후 구름 및 바람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구름이 찾아들고 바람이 불어 추워지므로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일 있을 등반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무뎌졌던 아이젠 날을 세우고, 장갑과 양말을 챙기고, 혹시 빠진 장비는 없는지 이것저것 확인을 하고….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은 새벽 5시 캠프1으로 떠나야 하므로…. 오늘 밤에 바람이 좀 덜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푹 잘 수 있게….

태그:#에베레스트, #등반, #로체,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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