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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평수

지난 2주일 동안 겪은 고소적응 과정 중에 일어난 사건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3400m 남체바자르까지 1단계 적응과정 : 루크라 공항에서 남체바자르
2) 4900m 로부체 2단계 적응
3) 5300m 헬기로 베이스캠프 가며 겪은 고소증.


[1단계] 남체 바자르까지

산행 사흘째(4월3일) 해발 3400m 남체 바자르의 숙소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를 쉬고 있다. 히말라야 원정출발 때부터 줄곧 머릿속을 짓누르는 공포 가운데 하나가 고소증이다. 어제 출발지점인 팍딩과 현재 머물고 있는 남체바자르 지점의 고도차는 800m. 대기압차이만도 80mb다. 원정대의 모든 주의사항과 대화는 ‘고소식(고소증에 걸리는 것)안 먹기’였다. 무던히도 고소증을 피하려고 했는데 고소증세가 있다. 어지럼증과 약간의 두통이 있다. 체온유지를 위해 24시간 털모자를 쓰고 물을 쉼 없이 마시고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려고 했는데도.

나는 이곳 남체에 어제 일행들보다 1시간 정도 늦은 오후4시쯤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놓고 잠깐 눈을 붙였다 깨고 나니 몸이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다. 약한 현기증이 계속되었다. 저녁에 닭매운탕을 먹고 즐겁게 웃고 놀다가 8시 반쯤 잤다. 깨다 자다를 반복하다가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남아 있다. 토스트로 가벼운 아침을 먹고 현기증을 누르면서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점심때가 다 된 지금도 순간 배 위에 타고 있는 느낌이다. 아스피린을 한 알 더 먹어 보아야겠다.

고소증은 사전에 많이 들었다. 스스로 체험하기 이전에는 경험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오히려 불안감이 더 컸었다. 허풍과 사실이 적절히 뒤엉킨 고소증세 설명들. 내 몸으로 직접 생체실험을 해보아야 정확한 해답이 나올 것 같다. 미리 서울 전문등산장비점에서 고도와 기압이 나오는 시계를 구입했다. 시간마다 기록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 경미한 고소증은 첫째 날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1500m)에서 2840m고지에 있는 루크라공항에 도착하면서다. 경비행기가 4000~5000m 고봉을 넘을 때 약한 멀미감이 있었다. 40분 비행 끝에 큰 산허리에 제비집마냥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진 루크라 공항에 도착하자 미식거림이 더 심해지고 현기증도 느껴졌다. 약간 한기도 느껴졌다. 고소증에는 추위도 적이다. 재빨리 준비해간 털모자를 덮어쓰고 따뜻한 티를 쉼 없이 마셨다. 소변을 한 시간 간격으로 볼 만큼 줄기차게 마셨더니 미식거림이 사라졌다. 호흡으로 부족한 산소공급을 물속 산소로 대신하는 것 같다.

이후 루크라공항에서 팍딩까지의 트레킹은 고도가 200m 낮아지므로 별 걱정이 없었다. 점심때까지는 잣나무 숲과 깎아지른 듯한 빙하협곡에 희뿌연 빙하수가 만들어낸 풍광을 감상하면서 산을 올랐다.

2740m 고도의 아름다운 조르살레. 강변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3440m 남체바자르까지 급경사를 쳐 올라야 한다. 출발을 앞두고 김미곤 대원은 “5분 이후부터 고소증세 구간이 시작된다. 구토만 하지마라. 우리 중 절반은 고소를 먹을 것이다. 하산에 대비해서 경치 좋은 로지(숙소)를 잘 봐 두라”고 겁을 준다.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수백m 협곡 중간허리에 걸려 있는 현수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뗀다. 덥다. 땀이 나지 않게 걸어라 했는데.

첫째 날 숙소가 있는 팍딩의 해발고도 2600m 대기압 741mb라 첫 도착 공항인 루크라보다 200m 낮다. 둘째 날 캐러밴 과정의 시간과 고도와 대기압변화를 보면 고소를 부르는 환경변화가 매우 심함을 알 수 있다.

12:55. 해발고도 2,935m, 대기압 710mb
13:15. 해발고도 3,000m, 대기압 704mb
14:00. 해발고도 3,100m, 대기압 696mb
14:30. 해발고도 3,200m, 대기압 687mb
14:50. 해발고도 3,300m, 대기압 679mb
15:22. 해발고도 3,340m, 대기압 675mb


이런 고도의 차이가 내 몸에 나타난 현상이 어지럼증이다. 그나마 머리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다. 신비로운 자연의 체험은 계속된다.

고산등반에 익숙한 우리 대원들도 크고 작은 고소를 경험했다. 막내 이석희 대원(22)이 가장 심한 것 같다. 이석희는 7000m 등반경험이 있다. 하지만 하늘같은 선배들과 동행에 따른 부담이 컸을 것이다. 고소증을 악화시키는 일종의 스트레스인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기록촬영 담당인 김창호, 윤중현, 박남수 대원이 출발 첫날 카투만두와 루크라 간의 경비행기 운항중단으로 본대보다 하루가 늦어졌다. 그 바람에 이석희가 캠코더를 대신 들고 캐러밴 대열 앞뒤를 급히 오간 것이 호흡조절과 고소적응에 무리를 준 것 같다.

이석희는 남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두터운 털모자와 우모복을 껴입고 멍한 표정으로 숙소와 식당을 오간다. 활달함이 현저히 줄었다. 하루 밤을 지낸 오늘 아침에는 눈이 반짝이면서 회복이 된 표정이다.

김홍빈 대원도 두터운 우모바지를 입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꿈쩍도 않고 쉬고 있다. 얼굴이 핼쓱하다. 이 베테랑도 팍딩에서 밤새 설사를 했다. 수 없이 많은 원정을 해온 베테랑 김홍빈도 초기 고소증을 겪는 것 같다.

다만 김주형, 김미곤 대원은 멀쩡한 얼굴로 준비에 분주하다. 기민하게 대원들에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보온을 위해 방한복과 온수를 챙겨준다. 원정이 처음인 대원들은 이곳 남체 골목시장에서 털모자를 구해 눌러 썼다.

박상수 대장은 거북이걸음으로 적응하는 노련미를 보였다. 한 고개 돌면 쉬기를 반복, 맨 꼴찌로 남체에 들어왔다. 이날 밤 전 대원이 잠들 때까지 전체를 챙기며 건재를 과시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박 대장은 캐러밴 출발부터 과열 과속을 적절히 조절하며 능수능란하게 통제했다. 원정대장이라는 과중한 업무로 고소증으로 죽을 고생을 한 선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등산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 아니다. 누가 가장 마음의 여유를 갖고 겸손히 안전하게 완주하느냐가 관건이다.” 고수다운 생각이다.

고소적응의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만의 페이스로 무리하지 않기다. 특히 화내거나 스트레스는 금물이다. 한국식 빨리 빨리로 가다가 낭패를 당한 이들은 셀 수도 없다. 당하고 나야 안다. 그래서 세르파 주민들은 얘기한다. “비스타리(Bistari),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라고. 평탄한 길이 나도 기존 주법대로 걷고 급경사 길이 나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천천히 올라간다.

세계 최고봉, 히말라야는 초입부터 인간의 기본기를 가르치는 것 같다. 주제를 알고 자기호흡, 자기 주법대로. (4월 3일 작성한 기사)

ⓒ 이평수

[2단계] 최연소 대원의 꿈은 고소증으로 좌절되고

남체(3440m)를 출발 탕보체(3867m), 팡보체(3985m) 페리체(4243m)를 거쳐 로부체(4930m)에 도착한 것은 4월 6일.

탕보체, 팡보체까지는 그런 대로 소나무 등 숲이 잘 발달되어 등반에 좋다. 그러나 페리체(4243m)쯤 오면 숲이 완전히 사라진다. 오로지 야크들의 먹이로 땅바닥에 들러붙어 있다시피 자라는 풀밭도 아닌 빈약한 초원이 계속된다. 수목성장의 고도 상한이 해발 4000m쯤 되는 것을 그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풀밭이라 하기도 어려운 초원도 투클라(4600m)쯤 오르고 나면 사라진다. 오로지 돌밭 자갈밭 모래밭으로 변한다. 쿰부빙하지대로 들어선 것이다.

원정대는 4월 6일 페리체에서 로부체 구간을 하루에 주파했다. 고도차이가 700여m 나는 강행군이다. 하루에 300m 정도로 고도를 올리는 것이 정석이거늘 두 배 이상을 하루에 끌어올렸다. 더욱이 4000m 대에서. 아침 8시 페리체 로지를 출발한 우리는 투클라에서 간단히 차 한 잔을 마시고 강행군, 오후 2~3시경 로부체 로지에 도착했다.

원정대와 트레커들이 붐벼서 숙소잡기가 어렵다는 이유라는데. 하여간 도착하자마자 각종 고소증세가 나타났다. 대소의 차이가 있지만 대원들을 비롯, 대부분 두터운 우모복을 꺼내 입고 보온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히말라야를 몇 번씩 찾았던 베테랑 대원들 오히려 초보대원들과 보폭을 맞추어 속도조절을 해서 걷는 것이 오히려 무리를 준 것 같다.

나는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지쳐서 한숨을 붙이고 나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급히 식당으로 내려와 뜨거운 차를 마셨다. 한 시간쯤 지나자 개운해졌다. 신기하다. 문제는 저녁을 먹는데 토할 것 같다. 억지로 밀어 넣었다. 로지에서 파는 달걀볶음밥에 고추장을 곁들였으나 도무지 안 먹혔다.

저녁 식사 후 이석희 대원이 얼굴이 하얗고 탈진한 모습으로 식당 한 켠에 기대 있는 것이 눈이 띄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일찍 올라와 잠이 들었다.

4월7일 아침. 머리가 여전히 어지럽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간밤에 이석희가 배가 아파 밤길을 강연룡 대장과 치링(현지 고용인)이 부축해 응급구호센터와 헬기장이 있는 페리체로 갔다고 한다. 밤길을 걷다 쉬다 해서 동이 틀 무렵에 페리체에 도착했단다.

비상이다. 아침 9시. 이석희가 맹장 같아 후송계획이라는 무전이 와 급히 나와 김창호, 김미곤이 페리체로 가기로 했다. 11시까지 2인승헬기가 온다고 한다. 환자와 내가 카투만두까지 가야 한다는데 도저히 그 시간 안에 갈 수 있을지. 6시간 올라온 거리를 아무리 내리막이라도 1시간 반 안에 도착해야 한다니. 하여간 뛰었다. 김창호는 다람쥐처럼 달려간다. 내리막에선 그런 대로 쫒았으나 평지에서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11시가 다가와 하늘을 본다. 헬기가 오나. 헬기 기척은 없다. 아마 김창호는 제 시간에 도착해 잡아 둘 수도 있겠지 하며 뛰었다. 나의 도착시간은 11시 18분. 다행히 헬기도착이 늦었다. 헬기도착이 늦어지면서 이번에는 히말라야 산간지역에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안개와 계곡바람 때문에 헬기가 뜨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진다.

다행히 12시 20분 헬기가 나타났다. 2인승 헬기에 석희를 태우고 겨우 몸을 실었다. 카투만두 도착은 거의 두시 경.

▲ 구조용 헬기에서도 통증으로 누운 이석희 대원
ⓒ 이평수
병원으로 옮겨 확인과 확인과정을 거쳐 최종 맹장염판정은 다음날 4월 8일 오전 12시경 컴퓨터 단층촬영을 하고나서. 카투만두에서 꽤 큰 옴병원 주치의는 즉시 수술을 권했다.

한국으로 가려면 후송조치는 해 주겠으나 당신들의 책임 하에 하라고 한다. 석희와 난 당황스러웠다. 망설였다. 이석희는 계속 통증을 호소하고 한국후송은 방콕을 거치면 하루길이다. 그래 이 병원 실력을 믿는 수밖에. 수술했다. 수술 다음날인 9일 물을 마시며 회복세에 들어간 석희는 10일 죽을 먹었다. 현지인을 시켜 쌀죽을 써 먹이고 저녁에는 닭죽을 주문했다.

11일 아침 일찍 베이스캠프 행 헬기를 타야 해서 병실에서 작별을 했다. 22세의 8000m 등정의 꿈은 매우 간단한 질병 맹장염 때문에 일단 좌절되었다. 고도를 높이는 일은 우리 몸에 이토록 복합적으로 작용을 미친다.

[3단계] 헬기와 고소증

헬기로 5300m 베이스캠프에 올랐다가 만난 고소증.

4월 7일 로부체(4930m)에서 급히 이석희 대원을 헬기로 병원에 후송하면서 카투만두에서 4일을 보내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11일 아침에 마침 카투만두에서 베이스캠프로 가는 헬기편이 있어서 그 편을 이용해 본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새벽6시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 8시 다인승 군용헬기에 올랐다. 1시간의 비행을 거쳐 남체바자르 군용헬기장에 도착했다. 내려서 급유로 1시간 대기한 후에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남체에 내리자마자 현기증이 나 급히 차를 마시니 잡혔다.

10시 헬기를 타고 10여분 비행 후에 베이스캠프에 내렸다.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헬기편으로 잠깐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던 방문단은 부축을 받으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반면 나는 놀랍도록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이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본대와 합류해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이번 원정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히말라야 방식의 기원제인 라마제를 지내고 난 이른바 음복이라며 억지로 소주를 반 잔 정도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애초부터 헬기로 수직 고도상승이 위험한 것이었는지 두어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베이스캠프 주변의 하얀 설산이 빙글빙글 돌았다. 버텨보려다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이대로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위험하다. 고소병에는 하산이 최고다. 결정하자마자 가이드 한 명과 함께 가장 가까운 코락셉(5288m) 로지로 하산했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눕체봉의 설산과 수십 미터의 빙하 낭떨어지를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고 두려움이 앞섰다.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려가기 말고는. 서투른 가이드는 우리말조차 서툴다. 고락셉에 어둠이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7시 10분께 도착했다. 발 빠른 사람은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두 배 이상 걸려 간 것이다.

▲ 로부체에서 고소적응을 마치고 5000m대의 고락셉으로 향하는 원정대
ⓒ 이평수
도착 당시 거의 기진맥진 탈진상태였다. 양다리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꼬이고 걸을 수가 없었다. 노련한 세르파 출신 도로지가 기운체조도 하고 급경사 내리막에는 옷 뒷자락을 잡으면서 렌턴 불빛에 기대어 거친 돌길을 아슬아슬하게 내려왔다. 천만다행이다. 급히 챙기느라 수통을 놓고 나와서 고통을 더했다.

고락셉 로지에는 마침 다른 원정대 박영석 대장(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이 있다가 친절하게 급히 몇 가지 응급약을 챙겨주었다. 세르파가 계속 내 얼굴과 눈동자를 확인하면서 고소에 좋다는 마늘 국에 팝콘을 말아주는데 억지로 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그냥 토할 것 같았다. 맛있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보온을 위해 난롯가에 앉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한 선배가 낙천적인 생각이 특효약이라는 생각이 났다. 순간 나는 내가 바라고 꿈꾸는 어느 한 순간을 떠올렸다.

내가 기뻐 환호하고 많은 지인들이 기뻐하고 축하인사들이 쇄도하는 장면이 현실처럼 펼쳐졌다.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나만의 카타르시스 축제였다고 할까. 이런 자의적이고 자기 최면의 시간을 만들면서 놀랍게도 고소증세로 탈진했던 나의 몸과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던 뱃속이 편안해졌다.

내 뒤에서 이 괴상한 장면을 망연히 보았을 도로지 세르파가 나에게 다가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물론 좋았다. 그날 너무 늦어 방이 없는 걸 박 대장의 배려로 끼어 잤다. 그러나 밤도 길었다. 아마 이뇨제 때문일 텐데 거의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소변을 보는 고역을 겪었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바로 로부체, 투클라를 거쳐 페리체까지 고도를 1000m 정도 낮추었다.

모든 아픔이 씻은 듯이 나았다. 단지 입맛이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연락하자 김홍빈 대원이 바람같이 달려 고추장과 몇 가지 입맛 돋우는 식품을 가져와 기력을 회복하고 4월 16일 본대 베이스캠프에 합류했다.

▲ 고소증과 추위를 견디면서 베이스캠프에서 작업중인 이평수 지도위원
ⓒ 이평수
페리체에서 사흘을 쉬고 올라오는 길은 중간에 로부체에서 하룻밤을 잤다. 기도하고 감사하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오는 과정은 양발이 무언가 힘에 의해 붕 떠서 걷는 느낌이었다. 호흡과 발걸음을 조화롭게 맞추며 히말라야의 설산과 상서로운 기운을 한껏 받으면서 가진 멋진 고행이었다. 놀라운 신체의 신비와 경이로운 마음의 힘을 체험한 기간이었다.(4월 18일 저녁 마감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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