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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07 한국도로공사 에베레스트 로체 원정대'의 기록이다. 원정대(대장 박상수)는 3월 28일 한국을 떠났으며, 4월 9일경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 뒤 '에베레스트' 등반대와 '로체' 등반대로 나뉘어, 4월 11일경 동시에 등반을 시작한다. 원정대는 5월에 에베레스트와 로체 정상에 오를 계획이다. 이 원정대에는 지난 90년 맥킨리 단독등정에서 사고를 당해 열 손가락을 잃은 김홍빈씨가 부대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 이 기사는 원정대 홍보담당대원으로 따라간 이평수 기자가 현지에서 직접 작성해 송고한다. 이 기자는 원정대가 귀국할 때까지 원정대의 일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편집자주>
12일 새벽 5시. 눈을 떴다. 가느다란 눈발이 내린다. 히말라야에서는 눈의 종류가 참 많다. 거의 떡가루같이 작은 알갱이로 하염없이 쏟아붓는 눈은 텐트 안에서 듣다 보면 비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모자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힘없는 눈발이 봄비 오듯 온다.

아무 준비 없이 베이스캠프촌 아침운동을 나갔다. 오랫동안 텐트 생활만 하다 보면 운동부족을 느낀다. 직선거리로 300~400m 거리에 있는 헬기장까지 걸으면 왕복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한참을 걸어 텐트촌을 다 지나 헬기장 가까이까지 갔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나 있다. 한 사람이다. 며칠 전 새벽길에도 만났던 그 사람의 발자국일까. 인기척 없는 새벽길에 반갑다. 내가 새벽잠을 털고 나선 5시도 이른 시간인데.

새벽 5시에 눈밭에 찍힌 신발 자국... 혹시 설인?

나보다 먼저 지나간 발자국. 주인공을 상상하는 것은 낭만적이다. 한 때 흥미를 모았던 설산의 설인 '예티'? 가능성은 제로.

그럼 이 발자국의 주인은 필시 히말라야의 어둠이 걷히기도 이전인 어두운 새벽시간 베이스캠프를 떠나 서해의 임시어시장 '파시' 같은 베이스캠프에 생활물자를 대고 남체나 팡보체로 내려간 것 같다.

신발 모양을 보면 둔탁한 체크무늬 발자국처럼 위압적이지 않다. 단순한 빗살무늬다. 어떻게 발자국에도 이런 돈 냄새, 아니 힘의 위력이 묻어나는 걸까.

남루한 운동화 발자국의 주인은 아마 간밤에 어느 원정대가 먹을 부식 즉 감자나 닭고기나 달걀이나 야채들을 머리와 등으로 이고 지고 해서 운송해주고 꼬깃꼬깃한 몇 루피를 받아 안주머니에 단단히 넣고 새벽길을 내려간 것이리라.

어느 나라건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삶의 이어가는 사람들의 삶은 새벽일과 연관이 많은 것 같다. 과거 농촌에서 부모님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바다로 다니셨지. 지금도 새벽 첫 지하철이나 첫 버스를 애용하는 계층은 여전히 서민층인 것처럼. 부지런한 농부는 새벽녁에 하루 일의 절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이 곳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도 우리 아버지뻘인 60세 이상의 실버원정대 아버지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전 중이다. 온갖 풍상을 겪고 살아오신 특별한 세대인 우리 아버지 세대.

그 분들의 집념과 의기가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많은 격려를 준다. 고령화 사회로 급격히 접어들면서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 전반에 굉장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 같다.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운동량을 늘리려고 헬기장을 벗어나 베이스캠프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더 내려갔다. 고갯마루에서 베이스캠프를 쳐다보면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처음 올 때는 멀기도 멀게 보였는데.

갑자기 가족 생각이 간절해진다. 한국의 여러 상황도. 그러다 이내 모든 것이 작아 보이고 내가 무얼 하겠다고 소리 지르며 걸었던 길들이 갑자기 우스워진다. 조금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하늘과 가까운 곳, 호흡이 중요하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 곳. 하얀 만년설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는 이 곳에서는 '호흡'이 참 중요하다. 모든 일에도 호흡이 중요한 것 같다.

공기 중의 산소량이 절반도 안 되는 이 곳에서 사는 것도 적절한 호흡을 통해서인데. 과연 얼마나 내가 하려던 일과 호흡을 잘 맞추어 해왔는지. 나 혼자 허우적대지는 않았는지. 이 고산에서 단 한 걸음도 호흡이 엇갈리면 뗄 수 없을 정도로 힘들던 경험에서 지난 나의 발걸음을 생각해본다.

몇 가지 생각에 매달리다가 다시 이 대자연의 위용에 압도된다. 푸모리봉이 사자 모양을 하고 앉아있는데 햇살이 봉우리 꼭대기부터 비추어 내린다.

몇 해 전 이곳 헬기장에서 이륙하려다 떨어진 헬기의 잔해를 뒤로 하고 다시 텐트촌으로 걸어올라오는 길.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팡보체로 간다는 포터 한 명이 '나마스테(기원을 담은 인사)'로 인사하면서 부산히 내려간다.

베이스캠프촌 오전 6시. 여전히 뿌연 눈발이 날린다. 아이맥스 영화 촬영기사가 아까부터 명장면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스폴로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두 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의무텐트를 돌아오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있다. 캐나다와 영국출신 자원봉사 여의사들로 봄 시즌 기간에 매우 즐겁게 일한다. 영국 BBC방송에서 이들의 삶을 중심으로 4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한다.

다시 우리 텐트로 올라오는 길. 나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따라 올라왔다. 눈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 발자국. 반갑다. 내 발자국을 내가 밟는 기분은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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