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에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사진김영선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과 보도 연맹원 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살해되었다. 끌려간 가족들에 대한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던 그들은 눈물과 한으로 얼룩진 세월을 살고 있다. 유가족들은 유해발굴조차 어려워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게 그저 죄송한 마음 뿐이다.
23일과 25일 두 차례에 걸쳐 전순애(79), 조성환(51) 모자를 만났다. 조씨는 현재 산내 유족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참석하며 잃어버린 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태어나기 한참 전 일이지만 어머니에게서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조성환 씨. 그의 어머니인 전순애 씨는 활발한 활동은 못하지만, 위령제 때마다 참석해 고인이 되신 시아버지를 위로 한다.
수감번호 44번, 불안해 하시던 아버지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전순애씨의 시아버지는 해방 직후 자수 기간에 자수를 했다. 그 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반적인 생활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음력으로 50년 5월 10일이었어요. 밤에 마루서 다 같이 모여 보리밥을 먹는데 경찰이 와서 시아버지에게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게 화근이었죠."
자수를 한 시아버지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이건 아는 사람한테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출두하라고 하면 도망갈 줄 알고 미리 얘기를 해 준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모르고…. 자수 했다는 생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신 거죠."
전씨는 "그 시기만 잘 피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조성환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할아버지의 수감번호 얘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세도면 지서에서 부여경찰서로 이감된 후, 그곳에 한 열흘 정도 있었는데 옷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씨의 아버지가 옷을 가져다주었다.
"옷을 가져다주러 면회를 갔는데 할아버지 수감 번호가 44번이었데요. 하필 44번이라고 너무 불길 하셨답니다.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대전형무소로 가신 모양이에요."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특별한 재판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한참이 지난 후, 대전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산내서 돌아가신 것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할아버지의 동생뻘 되는 분이셨는데, 대전 방동저수지 부근으로 시집가셨어요. 근처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논산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트럭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내리더래요. 날이 더워서 물을 마시게 하려고 했나 봐요. 그 때, 트럭에서 내리는 할아버지를 봤지만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데요. 아는 척 하면 같이 죽을 것 같아서…. 그 차는 대전형무소로 가는 차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