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패인 주름이 그 동안의 힘든 삶을 보여줬다.김영선
대전 산내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발발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와 민간인까지 최대 7000명이 집단 살해 당한 단일 장소 최대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성관(62)씨. 지난 17일 그를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깊게 패인 주름을 보니 그 동안의 삶이 꽤나 고단 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대전 부사동이었다. 1950년 당시 5세였던 그는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어머니의 말에 의존하고 있다.
보도연맹이 도대체 뭐라고
"아버지는 보도연맹이셨습니다.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때 당시 경찰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무슨 도장을 받아갔다고 해요. 도장 한번 찍어준 것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이유였답니다."
보도연맹이란 1949년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와 경찰은 후퇴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 처분을 단행하면서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 남한 내의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가입시켜 정부에서 효율적인 관리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죄 없는 그들의 친척이나 실적을 올리기 위한 강제 가입도 있었다. 박씨의 아버지가 그런 사례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을 잡아들인다는 말에 아버지는 급하게 피신했다. 경찰들은 피신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대전경찰서로 끌고 갔다. 당시 갓 돌이 지난 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철창 안에서 "제대로 수유조차 못하고 아기가 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고.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오셨는지 아버지가 경찰서로 왔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나타나니 어머니를 풀어주더래요. 어머니가 밖에 서 있었는데, 트럭이 오더니 산 사람을 차곡차곡 쌓았답니다. 트럭 가득 쌓더니 산내로 갔데요. 그게 1950년 7월, 당시 음력 5월 30일이래요."
죄도, 재판도 없었다. 힘없는 서민 이라는 것이 죄라면 죄일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사를 음력 5월 30일에 지낸다는 것"이 박씨의 말이다. 그 후 얼마쯤 지났을까. 동네에 인민군들이 와 있었는데 어머니가 억울한 얘기를 하니 "아버지 시신을 찾아 주겠다"며 산내로 갔다.
"그 때 어머니가 산내를 갔는데 땅 겉으로 팔이 빠져 나와 있었데요. 어머니가 팔을 잡아당기니 땅 속에서 부패가 돼서 쑥 빠지더랍니다. 그래서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데요."
"아직도 남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어려워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냐는 물음에 박 씨는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 잃고 충북 현도면으로 피난을 갔어요. 그 동네는 같은 성씨들만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는데, 아버지도 없고 친척도 없다고 그렇게 괴롭히더라고요. 피난 왔다고 얻어맞고, 아버지 없다고 얻어맞고. 요즘 말로 하면 왕따인 셈이죠.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고, 그게 제 마음속의 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5살 때부터 객지 생활 하면서 떠돌았어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억압당하고 주눅이 들어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