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자씨의 아버지김영선
그 때부터 문씨의 고생은 시작 되었다. 6·25가 터진 그 해,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도 떠나보내야 했다. 어머니마저 바로 개가를 한 터라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직 본인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힘들고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어요. 어른들이 아무도 안 계시니까 오직 동생들 데리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죠. 아무것도 모르니 누구 원망도 못하고, 배우고 싶어도 그것마저 사치였어요."
문씨는 '연좌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73년도에 서대전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와서 가보니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사촌 오빠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사망신고했던 것이 전부였다. 왜 사망신고를 했냐고 물어보고는 집에 돌려보냈다.
"경찰서에 갔을 때도 우리 집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연좌제가 무엇인지도 몰랐죠. 어느 날 아들이 무슨 시험을 봤는데 '나는 외할아버지 때문에 외국도 못나가고 자격도 2급밖에 안 주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아들이 자세히 얘기 해주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에요."
억울하기만 했다.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도 친척들에게 도움 한번 받지 못했던 그녀다. 친척들마저 본인들이 피해를 볼까봐 도와주지 않았다고. 누구에게 도움한번 청하지 못하고 속으로 한을 삼켜야만 했다.
문씨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떨어지고, 아직도 무서워 "유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연좌제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쌓아온 꿈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잘못된 시대 판단이 후손들까지 피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며 한탄한다.
지금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시기
"자식들 남겨 놨으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상 규명에 힘써야죠. 그래서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위령제라도 지내니까 한이 풀리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열심히 뛸 겁니다."
문씨는 유족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공공기관의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지역은 위령제에 대한 협조가 되는 반면, 유독 대전만 협조도 얻지 못하고 유가족들만의 힘으로 지내고 있다."는 것이 문씨의 말. 공공기관에서는 유족들의 과거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는 말로 회피하려고만 한다.
"죄송하다, 이해해달라는 식으로 말이라도 좋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신빙성 없다'는 말만 뱉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후손들의 인생을 망치고, 그 일로 인해 잘된 사람도 없고, 이게 얼마나 큰 피해입니까."
젊은 사람들과 공공기관, 정부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의 잘못 된 점을 상세히 알려 주고, 다시는 이 땅에 비극적인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 또한 주장하고 있다.
"보상을 해 준다고 보상이 되겠어요? 유족들 살아온 자체가 한으로 얼룩졌는데…. 마음의 상처는 보상이 안 되는 거잖아요. 빨리 유해 발굴 작업이 끝나고 명예 회복 되길 바랄 뿐입니다. 공원을 만들어서 유족들과 같이 제사라도 지내면 더더욱 바랄 것이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