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유가족 여태구(59)씨김영선
1950년 산내 골령골에서는 수도 없는 총성이 울렸다. 희생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땅에 그대로 엎어져 생을 마감했다.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온 유가족들은 내 아버지, 내 친 형제를 잃은 슬픔도 잠시, 기구한 삶의 운명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힘없이 약한 그들에게 이 세상은 버거운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야 그들의 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서글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 유가족은 대전 서구 월평동에 살고 있는 여태구(59)씨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얼굴은 없었다.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사진도 없습니다. 도망 나오기 바빴데요. 차라리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아버지 얼굴이라도 알게요."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것이 전부"라고 했다. 언제 끌려갔는지, 무슨 이유로 아버지를 잃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세 살 이었다.
"들은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없으셨고, 어떤 모임에 한번 왔다갔다는 이유로 새벽에 자다가 끌려 가셨데요. 그 모임이 무슨 모임인지는 모르지만 새벽에 자고 있는데 친구 2명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경찰이 있었답니다. 잠옷 바람으로 나가셨다는데요."
그는 아버지가 끌려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큰집 사촌이 당시 여운형(독립운동가)의 비서와 연관되어 있어 그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과 생이별을 한 그의 할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대전형무소에 2~3회 정도 면회를 갔었다.
"할머니가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저는 자유로워요, 죄수들에게 밥 주는 일을 하고 있고 심심하지 않아서 좋아요'라며 할머니를 안심시키더래요. 그래서 그런 줄만 알고 계셨데요."
죄수의 신분으로 형무소 안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죄명이 가벼운 사람에게만 주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죄명에 관계없이 무자비한 학살은 자행되었다. 그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면회를 간 날의 일이다.
"아버지가 형무소 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할머니에게 '어머니, 제가 죽을 것 같으니 이것이 마지막 면회가 될 것 같아요'라며 '제 바지 한쪽을 찢어 놓을 테니 나중에 제 시체를 찾아 주세요'라고 말했데요."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형무소 사람들이 총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어린 그를 업고 골령골로 갔지만 실신해 버렸다.
"바지를 찢어 놨으니 시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셨지만 온통 땅에 피가 범벅되어 있었고 손으로 몇 번 뒤적이니 알아 볼 수 없는 시체들이 말도 못하게 있었답니다. 더 이상은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 길로 저랑 누나를 데리고 다른 동네로 이사 했데요."
당시 그의 어머니 나이는 23살이었다. 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고향을 떠난 그의 가족은 이모네 집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만 했다.
"어머니는 남은 우리 모두가 죽을 까봐 무서웠던 거죠. 그러다 재혼을 하셨는데 재혼의 조건이 저희를 교육 시켜주는 것이었데요."
끝까지 자식들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다. 하지만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그는 전혀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여씨의 한으로 남았다.
살면서 연좌제로 인해 어디를 가나 신원조회를 받아야만 했고, 애써 일군 사업도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여씨의 집안은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했지만, 아버지를 잃고 도망 나오면서 아무 것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유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