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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이른 새벽,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바깥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창문 옆에 있던 침대를 골랐는데, 그 창문이 심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바람이 노하기라도 한 것인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리가 좀 나아졌다는 것이다. 별일 아니었지만,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레기까지 했다.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고 7시20분에 나섰다.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주위가 캄캄하다. 손전등이 없는 나는 착한 프랑스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걸었다. 그래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불편한 건 여전하다. 게다가 바람도 거세게 불고 빗방울도 떨어진다. 첩첩산중! 만만치 않은 길이지만, 그래도 신나게 걷는다. 발상태가 좋다는 것이 나를 흥얼흥얼거리게 만들고 있다.

김치찌개가 생각나!

이날의 목적지는 폰페라다로 정했다. 28㎞를 걸어야 하는데 가는 길이 어렵지 않다. 언덕을 넘을 때마다 마을이 보여서 물을 얻는 데 어려움도 없고 쉬는 데 불편함도 없다. 가는 길에 스페인어 특강을 해주던 무헤르를 다시 만났는데 여전히 스페인어 특강이다. 단어들만 주고받는 사이지만, 그 고마움을 어찌 갚을까? 내가 발음을 잘하면, 곧바로 서로의 손뼉을 찰싹 친다. 이런 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 신기하게 본다.

12㎞를 걸을 때쯤, 비에 젖은 몸을 데워줄 겸 바에 들렀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데 마을 사람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전날 한국인 여자 두명과 일본인 여자 한명을 봤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런가, 싶었는데 아뿔싸! 한국인 여자 두명과 나는 만나지 못했더라도 아스토르가에서 같은 날 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전날 나는 25㎞를 걷고 헥헥 거렸는데 그녀들은 이곳에 머물렀거나 지나갔다는 말이니, 최소 37㎞를 걸었다는 말이 아닌가? 우와! 감탄하면서 부러워할 뿐이다. 한국 낭자들의 발걸음이 언제나 신명나기를!

그동안 나는 바에서 커피나 맥주 정도만 마셨다. 그런데 이날따라 유독 프랑스 할아버지들이 먹는 샌드위치에 눈이 간다. 나도 먹어볼까? 아침을 먹은 상태지만, 목구멍은 자꾸만 꿀꺽 꿀꺽 한다. 몸이 괜찮아지니 덩달아 식욕까지 늘어난 것인가? 일하는 아가씨에게 하나 달라고 했다. 친절한 아가씨, 웃으며 건네주고 나는 기분 좋게 받았는데, 으악! 기름기로 무장이 돼있다.

샌드위치를 감싸는 포장지는 이미 진득진득! 한국에서는 기름기 빼는 것이 유행이건만, 이곳은 반대인 것인가?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싶어 난감해하는데 옆에 있던 할아버지들, 손짓으로 먹는 방법을 알려준다. 몰라서 그런 건 아닌데……. 군말 없이 따라했다. 유난히 얼큰한 김치찌개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혼자선 쉽지 않다

▲ 순례자들
ⓒ 정민호
홀로 걸을 때의 어려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첫 번째는 비가 올 때다. 외롭다는 느낌? 아니다. 혼자라는 것을 느낄 때는 우비를 입을 때다. 커다란 것인지라 입고 나서 가방 쪽을 따로 정리해줘야 하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드림팀과 걸을 때는 서로 해줬지만 혼자일 때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해야 한다. 그나마 지나가던 순례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럴 때는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혼자임을 자각하는 건, 길을 잃을 때다. 함께 걸을 경우 이상하다 싶을 때 서로 상의해서 발길을 돌리면 된다. 하지만 혼자라면, 지나친 자신감으로 무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게 돼서 더 늪에 빠지게 된다.

이날도 그랬다. 기분 좋게 산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돌아서야 하는 건데, 저 멀리서 마을도 보인다는 이유로 그냥 걸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언덕으로 올라간다. 뭔가가 이상하다, 싶은 순간, 아뿔싸! 길이 막혀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무리를 한다면 상당히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면 된다. 하지만 비가 오는 이 마당에? 돌아가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그럴 체력은 없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내려갔는데 이런! 유럽에도 가시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큰길에 도착하고 보니 반바지를 입었던 탓에 무릎 아래쪽은 따갑다 못해 얼얼하다. 내 비닐우비도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 그래도 저곳을 내려왔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홀로 터벅터벅 걷는데 내 입장에서 보면 엉뚱한 길에서 순례자들이 나타난다. 서로 어색하게 보는 상태.

나는 멋쩍게 "부엔 카미노!"를 외쳤다. 그런데 내게로 다가온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내 우비에 들러붙은 가시나무들을 떼 준다. 아, 내가 이러고 걸었단 말인가! 역시, 혼자는 쉽지 않다.

스페인에선 사람이 빨간 신호등

▲ 폰페라다
ⓒ 정민호
도시에 도착해서 또 길을 잃었다. 알베르게 표시판을 보지 못한 탓에, 도시 변두리까지 갖다 온 것이다. 비까지 억수로 쏟아지는 마당이니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 게다가 스스로가 한심한지라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당장이라도 지팡이를 내던지고 싶지만, 노젓기 걸음을 해야 하는지라 힘겹게 걸어간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놀라운 일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차들이 먼저 멈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파란 불이 켜졌을 때도 무작정 우회전 해 들어오는 차량들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여러번인 터라 파란 불이 켜져도 늦게 출발하는 것이 내 버릇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곳에서는 신호등이 없어도, 차들이 먼저 멈춘다. 내가 횡단보도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걸어가고 있어도 그렇다. 당황해서 운전자를 보면 운전자가 웃으며 손짓한다. 경험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헤매고 헤맨 끝에 오후 5시,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원래 그러냐고 물어봤다.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왜? 호스피탈레로가 내 지팡이와 조개껍데기가 매달린 가방을 손짓한다. 이것 때문에? 단지 순례자라는 이유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 이 길이 안전하다고 하는 건 이유가 있구나.

그 순간 문득, 내가 산티아고 간다고 했을 때, 부럽다고 했던 여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녀들은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 걱정돼서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했다. 그때는 나도 막연하게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고 만다.

"얘들아, 여기는 괜찮아!"

역시 여행준비는 철저히 해야한다

▲ 알베르게
ⓒ 정민호
함께 길을 잃었다가 얼굴을 익힌 영국인 마이크와 투덜거리며 배정받은 침대를 찾아갔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기쁨에 가방을 힘껏 내려놓았다. 그런데, "찌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내 가방?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가방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맙소사! 오른쪽 어깨 끈 위쪽이 뜯어진 상태다. 생각지도 못한 일! 이를 어찌해야 하나? 얼굴이 시뻘게지고 만다.

마이크는 가방의 무게를 왼편으로 쏠리게 하라고 충고한다. 남은 기한은 8일 정도니 그렇게 하면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래도 걱정은 된다.

비가 올 때는 어쩌지? 이미 우비라기보다는 커다란 비닐 쪼가리라고 말해야 할 그것이 이걸 막아 줄 수 있을까? 설사 막아준다 해도, 무게를 무리하게 옮겼다가 왼쪽도 찢어지면?

그뿐만 아니라 물건을 도둑맞을 위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방을 잠그는 열쇠 같은 것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만 더 찢어서 손을 쑥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울랄라, 울랄라! 이럴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옛말 하나 틀린 것 없다더니, 역시 그랬다. 유비무환이구나. 떠나려는 이들이여, 언제나 명심하시길! 여행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 자괴감과 불안함이 뒤섞여 침대 위에서 중얼중얼 거릴 뿐이다. 부디 무모한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기를! 걱정하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뒤척였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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