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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
ⓒ 정민호
아침 6시 30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날도 자욱한 안개가 가득하고 산길도 어두웠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50m쯤 앞에 사람들이 가고 있기에 그들을 조타수 삼아 뒤따른 것이다. 적어도 길 잃을 염려는 없었는데 대신에 몸이 금방 달아오른다.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내면서, 지팡이로 어두운 길을 툭툭 치며 돌발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체력이 두 배로 드는 것 같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고민이 든다. 긴팔을 입고 있던 터라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다. 벗기는 벗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저들을 놓친다. 그대로 입자니 답답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어둠 속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 앞의 사람들은 금세 사라져가고 나는 라이터에 의지해 가방을 여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옷이 가방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다급한 마음에 무조건 구겨 넣지만 소용이 없다. 그 와중에도 내 눈은 사방을 경계하기에 정신없다. 귀신 나오면 재빨리 도망치겠다는 다급한 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다른 순례자가 오는 것이다. 잠시 후 손전등이 내 가방에서 딱 멈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헤이버그 할아버지다.

"핫?"(더워?)
"예스. 핫."(네. 더워요.)
"흠… 핫."(더워.)

그 짧은 말과 함께 우리는 같이 걸었다.

걷기의 즐거움, 두말해 무엇하리오. 이날 걷는 길은 마을을 벗어날 때를 제외하고는 평지가 계속됐다. 그런 탓에 뻔한 것 같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일까? 그것들을 보는 것도 재밌지만 지나가면서 만나는 순례자들과 인사를 하고 짧은 이야기를 하며 걷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포도서리는 또 어떤가? 바에서 들려오는 장 마리의 연주소리는? 구름이 이동하는 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걸으면서 중간 중간 마시는 물 한모금의 시원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규격화된 문명과 온실 속 문화에는 이제 싫증이 난다.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보면서 내가 부러워했던 구절이지만,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부러움을 접게 된다. 왜냐하면, 저 구절은 책의 구절이 아니요 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것은 오롯이 내 이야기였고 나는 그 접촉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해본 게 언제더라?

▲ 알베르게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례자들
ⓒ 정민호
26km를 걸어 낮12시 20분에 팔라스 델 레이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문이 1시에 열린다고 기다린단다. 전날 알베르게를 이용한 순례자들의 흔적을 치우는 시간인 셈이다. 덕분에 30분 정도 수다를 떨다가 들어가야 했는데, 이럴 수가! 이곳 알베르게의 방은 큼직할 뿐만 아니라 공간도 넓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빨래와 샤워부터 처리하고 보니 낯익은 기계 하나가 또 보인다. 컴퓨터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한 게 언제였더라? 인터넷 안하면 손이 근질거렸었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못한 시간도 많다. 그런 시간을 다 합하면 몇날 며칠이던가?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과거가 무색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첫날 론세스발레스에 도착하자마자 바에서 1유로를 넣고 하려고 했지만 한글 폰트가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후로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그것이 자연스레 익숙해진 것이다. 인터넷, 안녕!

여기서 미츠에를 다시 만났다. 또한 일본인 한명을 더 만났다. 그의 이름은 아키! 사자머리를 한 것이 한눈에 봐도 일본인스럽게(?) 생겼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여기서는 동양인이 더 반갑고 편하다. 밥 먹고 싶다는 마음을 이해해주는 동지이니 오죽하겠는가.

김치 없어서 나빠?

▲ 팔라스 델 레이
ⓒ 정민호
슈퍼마켓을 잘못 찾아들어갔다. 사람들이 가르쳐준 곳으로 가야하는데 엉뚱한 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내가 들어간 곳은 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거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일이 시커멓게 변한 것이 심각하다. 이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뼛거릴 뿐이다.

그곳을 나오자 친구들이 보인다. 내가 나온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기에 말렸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영국인 매튜가 왜 그러냐고 묻는데 대답이 궁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때 매튜가 선수 친다. "김치 없어서 그러지?"라고.

그 순간에는 그저 웃고 말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김치'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서 춤을 춰댄다. 된장찌개는 어떨까? 가뜩이나 비가 와서 그런지 파전도 생각나고, 아니면 삼겹살에 상추쌈은? 다른 순례자들을 돌아본다. 그들은 먹을 것에 대해 전혀 고민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우습지만 그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것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줄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순수한 감정인 것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것이지만, 그때만큼은 유독 집 생각에, 정확히 말하면 집에 있던 밥통 생각이 나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심각하게, 약간은 진지하게.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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