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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거리
ⓒ 정민호
이른 시간,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깼다. 바람이 꽤 심하게 분다. 시간을 보니 오전 5시. 좀 더 잘까 했지만 산티아고에 갈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아침을 먹다가 유머와 만났다. 이날만큼은 헤어지면서 "부엔 카미노!"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 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몬테 델 고조를 빠져나오니 곧바로 도심가다. 사실상 산티아고 외곽이라 할 수 있다. 커다란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화살표가 사라졌다. 이런, 여기서도 길을 잃다니!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없다. 게다가 도로가 넓은 지라 차를 세워서 물어보기도 어렵다. 두리번거리며 걸을 뿐이다. 그런 중에 다행히 경찰이 내 행색을 보고 사정을 눈치 챘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라고 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2km를 가면 돼" 그가 가리킨 손끝을 향해 걸었다. 그리하여 오전 8시 30분,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했다.

최고의 상장을 받다!

▲ 산티아고 성당
ⓒ 정민호
이곳에서는 증명서라는 것을 준다. 성당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는데 직원들이 순례자 여권을 확인한 뒤에 이름 등을 적는다. 이것은 특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용적인 면으로야 산타아고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교통편을 할인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나 같이 고국으로 돌아갈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장으로서는 어느 것보다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는 것, 꿋꿋이 참고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받았다. 구겨지지 않도록 통에 넣은 그것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정오에 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열린다고 한다. 종교는 다를지라도 참석하기로 했다. 그동안 만났던 순례자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정도. 산티아고 거리를 구경해볼까 했지만, 왠지 흥이 나지 않는다. 대신에 산티아고 성당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속속들이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과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시간은 금세 갔다.

성당에 들어간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놀랐다. 엄청난 관광객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서 단체 관광이라도 왔는지 사방에서 일본어가 들린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성당 내부에서 사진을 찍든, 돌아다니며 떠들든 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엄숙'이라는 단어가 이곳에 발을 붙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만의 세리모니를 나누며

▲ 미사가 시작되기 전
ⓒ 정민호
자리를 잡고 앉아 순례자 여권을 펴봤다. 각양각색의 도장들이 보인다. 손끝으로 그것들을 쓰다듬어보는데 신기하다. 평면이건만, 입체적으로 만져진다. 이곳에서 드림팀을 만들고, 이곳에서 물집 때문에 미칠 것 같았었고, 이곳에서 작별하고, 이곳에서…. 너무 몰두했는지 순례자 여권에 물기가 생기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창피하게도,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어깨를 두드려줄 때까지도 그렇게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에 급히 눈가를 훔쳤다. 이 나이 먹어서 이게 무슨 꼴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종교도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미사가 어떻게 진행 되는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관심도 없었다. 그곳의 신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미사가 진행되는 1시간 동안 걸어온 길을 떠올리느라 시간 가는 지도 몰랐다. 미사가 끝났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을 정도. 끝나고 나니 사람들이 흩어진다. 의외로 담담하다. 일말의 아쉬움에 산티아고 성당을 구경했다. 이리 저리 돌아보는데, 어디선가 낯선 악기 소리가 들린다. 바로 언제나 똑같은 노래만 연주하던 장 마리의 리코더 소리!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있었다. 장 마리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크리스토퍼와 마이크, 안토니오와 밴, 스페인 삼총사, 찰스, 당테, 프랑스 할머니들과 이름은 몰라도 이미 친구가 됐던 순례자들이 가방을 들고 지팡이를 옆에 낀 채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저 노래만 연주해서 지겹다고 말했었다. "스탑, 플리즈!"를 외치기도 여러 번. 하지만 이때만큼은 아니었다. 연주가 사랑스러웠다. 어느 때보다 큰 박수를!

마지막이라 그런가? 장 마리가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지 노래를 부른다. 처음 있는 일인데 어색하지가 않다. 가사를 아는 사람들은 따라 부르고 나처럼 음만 아는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서 흥얼흥얼거린다. 둥글게 모여서 음을 만들어내는 우리가 관광객들은 신기한가보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진다.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우리는 껴안았다. 그것이 세리모니였다. 우리만의 소중한 세리모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내게 준 것은

▲ 추억이 담긴 도장들
ⓒ 정민호
성당을 나오는데 관광객들이 내게 손을 내민다. 뭔가 해서 보니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다. 설마 나에게? 악수를 하자고 다가온다. 민망하게, 얼떨결에 악수 세례를 받았다. 이런, 너무 쑥스러운데.

마침내 성당을 나왔다. 다시 돌아보니, 내가 오던 길이 보인다. 이곳에 오기 전에, 소심했었다. 갈까 말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 때문에 뒤척거리는 밤도 여러 번 보냈다. 길 가다가 칼 맞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고, 길 잃어서 인생 꼬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언어 하나 못하는데도 스페인 간다고 할 때, 친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아니면 나중에 영어라도 제대로 공부해서 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무모하게 비행기를 타버렸다. 그리고 결국 이곳까지 무사히 왔다.

이 길에서 스요시와 드림팀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헤이버그 할아버지와 미츠에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고, 그들에게 배려를 배운 것도 행운이었다. 그들과 물 한 모금 나눠 마신 것도 행운이고 음식 하나 나눠먹은 것도 행운이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잠을 잔 것도 행운이고 스페인의 파티에 참가한 것도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장 마리의 연주를 들은 것도 행운이고 눈물을 흘린 것도 행운이었다. 그것이 행운이라는 것을 아는 내가 자랑스럽다. 또한 이 행운을 놓치지 않은 내가 사랑스럽다. 내가 자랑스럽고 내가 사랑스럽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겠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내가 되겠지? 산티아고 성당을 향해 손을 흔들어본다. 내 가방 끈 고쳐주던 프랑스 할머니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부엔 카미노! 산티아고 가는 길, 무모한 여행은 끝났지만, 인생이라는 길은 계속된다. 이제부터 이 길에서 배운 것을 내가 가는 길에서 꼭 실천하리라. 부엔 카미노! 내가 미처 걷지 못한 길을 다시 걷기 위하여 올 때, 이 다짐이 무색하지 않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걸어야겠다.

산티아고, 고마워, 다시 올 때까지 무사하게 있어라!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를 위하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미 걸었던 사람들과 앞으로 걸을 사람들을 위하여. 부엔 카미노! 웃으며 돌아섰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끝났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많으니까 다시 힘을 내야 한다. 신발끈을 고치고 다시 걷는다. 무모한 여행은 계속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 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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