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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새벽 6시40분에 알베르게를 나섰지만, 역시나 어둡다. 더욱이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불빛들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어둠천지! 바야흐로 또 다시 공포체험을 해야 하는가 싶어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있어 어렵지 않게 어둠을 비껴갔다.

어둠은 무사히 벗어났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적당한 곳으로 피해 우비를 입는데, 이런! 쉽지가 않다. 아무리 낑낑거려도 가방 쪽이 가려지지 않는다. 지팡이를 이리 저리 돌리며 끙끙거리는데 누군가가 날 도와준다. “그라시아스!”하고 돌아보니 전날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일본 여성이다.

이름은 미츠에. 한국 여성 두 명과 같이 걷기도 했다는 그녀는 체구는 작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넘나들며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는 여행 고수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오 세브레이로란다. 나와 목적지가 같은 셈. 이때부터 함께 걷게 됐는데, 어마어마한 빗소리에 말을 나누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함께 말없이 걸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참 어색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서바이벌 하는 거야?

▲ 돈 아낀다고 일회용 비닐 우비를 지닌 나로서는 세상에서 저들이 가장 부러웠다.
ⓒ 정민호
어색하게 길을 걷는 사이, 베가에 도착했다. 11km를 걸은 셈인데 이미 신발은 축축하고 우비를 입은 보람도 없이 옷도 다 젖은 상태다. 머릿속으로는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다.

미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탓에 우리는 별 말 없이 다시 속력을 냈는데, 걸을수록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화살표를 따라 걸었는데,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산길도 뭔가 불길하다. 더욱이 가이드북을 갖고 있는 미츠에의 말에 따르면 오늘 코스에 등산할 일이 있지만, 베가는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걷는데, 점차 길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눈앞은 오로지 풀밭! 나와 미츠에는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지팡이로 그것들을 헤치며 걸었다. 걷다보니 비명소리가 나온다. 가시나무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헤쳐 나갔다. 비탈길이 나타나면 서로 손 잡아주며 헉헉거리며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길은 더욱 험해진다. 서바이벌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며, 그래도 재밌다는 말을 하며 길을 뚫고(!) 나가는데, 갈수록 길이 험하다. 어찌 해야 하는가?

나는 더 가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미츠에는 돌아가자고 한다. 여기서 돌아가자고? '맙소사! 그건 안돼!' 라고 우겨볼까 했지만 가시나무가 만만치 않아서 돌아섰다. 다시 모험을 하며 내려온 베가 입구, 우리는 어색한 사이였던 것을 뒤로 하고 나란히 서서 “야호!”타령을 하고 만다. 함께 위기(?)를 겪은 탓일까? 만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알고 지낸 건 몇 년도 더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재밌다, 그리고 아름답다

▲ 이 때만큼은 소떼가 왕이다
ⓒ 정민호
본격적인 등산길이다. 발상태가 비정상이었다면 꽤나 고생했을 터인데, 다행히도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걷다가 적당한 곳이 보이면 쉬고 싶은데, 그럴 만한 곳이 없다. 결국 가방을 베게 삼아 아스팔트 위에 누웠다. 눕고 보니, 기분이 몽환적이다. 스페인 땅에서 일본 여성과 친구 되어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을 줄이야! 내 친구들이 알면 무슨 소리를 할까?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데 저 앞의 순례자들이 벽에 붙어있다. 뭔 일인가 했는데, 아뿔싸! 산딸기의 향연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지친 마음, 타는 목을 위로하고도 남을 그것에 나와 미츠에는 달라붙어서 정신없이 따먹었다. 산딸기 코스를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하는 그것, 아름다움에 새삼 놀라울 뿐이다.

비는 계속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이 변덕에 할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걸었다. 그때 미츠에가 소리친다. 왜? 하고 고개를 드니 오, 맙소사! 돈 주고도 못 본다는 풍경이 이런 것일까? 50m 앞에는 햇볕이 쨍하고 우리 자리에만 비가 온다. 100m쯤 뒤에는 또 햇볕이 쨍하다. 그렇다면? 몇 걸음 걷고 보니 햇빛이다. 그 뒤로는 비가 내리고 보라색 오로라가 생겨나고 있다. 비구름의 이동을 이렇게 짜릿하게 구경하는 순간은, 난생 처음인지라 눈을 뗄 수가 없다.

오 세브레이 도착 5km 전, 깜짝 놀랐다. 저 앞에 웬 소들이 몰려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길 비켜줘야 하는 건가? 그렇다. 처음으로 동물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소떼와 멍멍거리며 소떼를 뒤따르는 강아지 두 마리를 보고 있노라니 이 순간이 ‘충격’적일 뿐이다. 꼭 말해줘야지.

“애들아! 나 소한테 길 양보했다!”

이거 네 돈 아냐?

▲ 오 세브레이로
ⓒ 정민호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높은 길을 올라야 했던 탓도 있지만, 역시 베가에서 헤맨 것이 시간을 지체하게 됐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슈퍼를 찾아 나섰다. 역시, 엄청난 높이다. 아담한 마을과 올라온 길을 돌아보는데, 울랄라! 쌍무지개가 마을을 뒤엎고 있다. 반드시 찍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진기를 들고 높은 곳에 올랐는데, 뭔가 이상하다. 누군가가 날 부르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10유로짜리와 5유로짜리를 내밀며 "유어 머니"란다. 무슨 소리야? 했다가 주머니를 만져봤더니 그곳에 있어야 할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사진기를 빼다가 돈이 빠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혼자 사진기를 들고 높은 곳을 찾아다녔고 그들은 열심히 날 쫓아 온 것이다.

오, 세상에! 나였다면 어땠을까? 갈등하고 말았을 것이다. 출국 때 환율한 것으로 하면, 8유로가 만원 정도인 만큼 갈등에 갈등을 거듭했을 터인데… 고개를 꾸벅 숙여 고맙다고 말했다. 이때만큼은 한국식으로 하고 싶었다. 돈도 고맙지만, 당신들 마음이 더 고맙습니다.

▲ 알베르게에서 바라본 세상
ⓒ 정민호
알베르게에 돌아온 뒤, 새삼 산티아고 가는 길을 생각해봤다. 나는 이 길에서만큼은 물건을 도둑맞은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나도 많이 받은 터였지만, 이곳에서는 나눠주는 일만 있다. 왜 그럴까? 서로가 같은 처지이기 때문일까? 이 길은 미스터리 하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경험론(!)에 의거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산티아고 가는 길, 이 길은 안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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