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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눈을 뜨자, 미츠에와 찰스 할아버지 그리고 크리스토퍼 모두 자고 있다. 손전등이 없는 나로서는 널어놓은 빨래부터 신발, 지팡이, 가방, 물통, 침낭 등을 두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고 방에서 나와야 한다. 나 좋다고 불 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 앞에서 졸린 눈 비벼가며 가방을 정리하는데 크리스토퍼가 나온다.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손전등이 없는 그도 나처럼 나올 줄 알았는데 이미 그는 가방을 매고 있다. 이럴 수가! 여행 고수와 하수는 이렇게 다른 것인가? 감탄할 뿐이다.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에 미츠에와 작별인사를 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곧장 17km 거리에 있는 사리아에 들렀다가 5km 더 걸어서 바르바델로까지 가는 것이 내 계획인 반면에 미츠에는 사모스를 들러서 사리아까지 가겠다고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가장 멋진 알베르게가 있다는 사모스를 놓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의견! 아, 그녀가 부럽다! 내 빠듯한 일정이 아쉬울 따름, 그런 만큼 힘차게 말했다.

“부엔 카미노!”

도대체 여기는 어디야?

길을 걷다가 느낀 바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몸이 좋다고 무리해서 걷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계획 세운 대로 하겠다고 무리하게 몸을 놀리는 것도 위험하다. 이 길은 하루에 끝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산티아고에 간 뒤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알고, 배려하는 것이다.

이날 나는 확실히 알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 최고의 몸 상태라는 것을. 몸이 좋으니 마음도 좋고 콧노래도 절로 나온다. 게다가 가는 길은 또 어떤가? 내 가는 길을 호위해주는 이 녹음에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함께 걷는 이가 없으면 어떤가? 먼 곳에서,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기쁘다! 머릿속에는 그것밖에 없었다.

▲ 사리아
ⓒ 정민호
그 기쁨을 만끽하며 걷는데, 어라? 뭔가가 이상했다. 이 기쁜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가 전후방 100m에 아무도 없던 것이다. 설마? 급히 화살표를 찾아봤는데, 없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쁨의 물결은 사라지고 몸은 얼어붙는다. 초조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음속에서는 불같은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돌아가느냐? 이대로 가느냐?”하는 문제! 이것은 햄릿의 것에 비하면 초라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심각한 고뇌이자 번뇌임에 분명했다. 나는 고민 끝에 앞으로 걷기로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돌아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앞으로 걷다보면 전 세계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다는 노래도 있는 만큼 당연히 길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느덧 나는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속 편한(?) 인간이 되고 있었다.

걷다보니 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이미 화살표는 없는 상황. 오감을 믿고 오른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30분을 걸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사람이 없다. 마을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한가로이 날 바라보는 젖소들뿐이다. 도대체 여긴 어디인가?

아, 나는 왜 몰랐던가? 몸을 알고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야 하는 길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길거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후회하고 또 자책했다. 지나친 흥분은, 금물이었다.

알베르게에서 말싸움이 벌어지다!

지나가는 트렉터를 헉헉거리며 따라가기도 하고, 언덕에서 습격해 오는 네 마리 강아지를 피해 무거운 가방 맨 체 달아나기도 하며, 먼 곳에서 보이는 사람 그림자를 찾아다닌 끝에야, 사리아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은 낮12시 30분. 발바닥이 후끈거리는지라 몸을 배려하자는 핑계를 대며 이곳의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했다.

▲ 알베르게
ⓒ 정민호
알베르게의 방에는 총 12명이 잘 수 있는데 젊은이들은 모두 아는 이들인데 노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사모스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최소 거리를 걸은 사람들 같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독일인 크리스토퍼와 프랑스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도 없다는 생각으로 애당초 해석할 생각도 안하고 빨래를 너는데 집중했다. 그런데 자꾸만 듣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걱정하던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바로 ‘개인’과 ‘개인’의 충돌이다. 말싸움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할머니는 피곤해서 낮잠을 자려고 하는데 크리스토퍼가 마이크와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며칠 생활해 본 바에 의하면 크리스토퍼의 큰 목소리는 고의는 아니다. 원래 크다.

할머니는 “산티아고 가는 길은 노는 길이 아니다”고 말하고, 크리스토퍼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당신이 자는 권리가 있는 만큼 나도 말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서로들 ‘산티아고’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데, 듣는 것도 어려운 나는 멀거니 보기만 할 뿐이다.

하기야 정확히 듣고 말을 할 줄 알면 무엇 하겠는가? 사실 나는 이 광경이 충격일 뿐이다. 한국에서 저렇게 두 눈 부릅뜨고 할머니에게 목청 높인다면? 지나가던 어른들이 달려들지 않을까? '이것이 서양의 문화인가?' 하는 생각만 든다. 또한 명분부터 내세우는 건 동양이든 서양이든 다 똑같다는, 약간은 삐딱한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씁쓸한 순간이지만 어쩌겠는가. 대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룸메이트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싸움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문제를 이십 여일이 지나서야 처음 본 것이 오히려 행운이 아닌가 싶다. 아무렴, 이곳도 인간이 사는 곳인데! 이래저래 독특한 경험을 쌓으며 무모한 여행은 계속됐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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