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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아. 도시와 달리 산티아고 가는 길은 불빛이 없다.
ⓒ 정민호
아침 6시 20분에 알베르게를 나선 뒤 10분 쯤 걷자 잠자는 도시의 외곽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내 발걸음이 딱 멈춰졌다. 한눈에 봐도 산길이었다. 이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특히 안개가 자욱한 이곳에서 내가 과연 저기를 갈 수 있을까?

디카 플래시를 터트리며 갈 속셈으로 디카를 꺼내는데 반갑게도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이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알베르게에서 내 위에서 자던 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는 내가 만난 순례자 중에서 가장 무뚝뚝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랑 말도 안할뿐더러 누가 인사를 해도 갸우뚱하며 쳐다보는데 전날 나도 그 때문에 꽤나 무안했었다. 그런데도 함께 가야 하는 건가? 물론, 여기서 내 의사는 중요치 않다. 할아버지가 나를 싫어하면 그걸로 끝이다. 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올라!"라고 인사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역시나, 민망할 따름이다.

무뚝뚝한 할아버지와 동행을 시작하며

▲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손전등만 있으면 앞질러서 갈 테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저 뒤에서 졸졸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상한 길로 접어든다. "산티아고!"라고 외치며 손짓했더니 내가 가리킨 곳은 자전거 길이란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이런! 다시 마을이다. 할아버지는 민망한지 날 보며 "울랄라!"한다. 상상이 되시는지.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의 그 감탄사가? 나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내가 말했던 길로 돌아오는데 할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왔다면서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이라니까 대답하니까 영어 할 줄 아냐고 묻는다. "노!"했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묻기에 "노!"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영어로 천천히 말하는 게 일반적이고 나는 그걸 노렸던 것인데, 할아버지는 그대로 직역했는지 말을 안 건다. 난감한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산길이었다. 나무들은 하늘을 가렸고 안개는 자욱하다. 불빛 같은 건 당연히 없다. 오르막이라 길도 험하다. 걷다보면 돌에 걸려 넘어지는 건 예사고 부러진 나무 때문에 아찔한 순간도 겪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손전등 하나에 모든 걸 의지해야 하는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할아버지는 오르막길을 잘 못 걷는다. 그러다보니 손전등은 바로 앞의 길을 비춰야 한다.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화살표를 놓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 포르토마린
ⓒ 정민호
그래도 어렵사리 꾸역꾸역 길을 걷는데 갈래길이 나온다. 내가 라이터까지 꺼내어 찾아봤지만 화살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나무 위에 노란 색으로 된 직선이 하나 보였다. 나는 이거 같다, 고 생각하며 그쪽으로 걷자고 말했고 이때부터 내가 앞장섰다. 어두운 건 여전했지만 할아버지가 어렵게 걸으면서도 앞쪽을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혼자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하겠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걷는 할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안개로 뒤엎인 산길을 걷는 그때, 제발, 제발, 거리며 사방에 라이터를 들이댔다. 그러나 화살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메르씨 부꾸"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내가 본 직선이 화살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라이터불 켤 때마다 손마디가 아팠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불을 켜며 제발을 외칠 뿐인데, 어느 순간, 할아버지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의미하는 비석을 찾아(?)냈다! 할아버지는 "오!"하며 안도의 큰 숨을 쉬고 난 보자마자 "앗싸!"를 외쳤다. 아, 그때의 감동이란! 2002년 월드컵 때와 유사하다고 할까. 난 방방 뛰었고 곧바로 할아버지를 얼싸 안았다. 할아버지도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런데도 그 포옹이 무색하게, 30초도 안되어 우리는 이날 처음 만난 것 같은 감정으로 돌아갔다. 나처럼 할아버지도 겸연쩍은 건지 말 한마디 없이 길 찾는데 주력한 것이다. 누가 이런 우리를 본다면, 포옹은커녕 싸움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20분쯤 걷자 마을이 나오고 화살표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할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걷는 속도를 맞출 때가 된 것이다.

입에서, "저기요"라는 한국어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들어 화살표를 가리킨다.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할아버지, 메르씨 부꾸예요"라고 말했다. 아! 근사하게 프랑스어로 하고 싶지만 이런 정체불명의 언어로 말했는데, 할아버지가 알아들었나 보다. 날 한번 휙 돌아보더니, 예의 그 엄숙한 얼굴로,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민망하지 않았다.

▲ 알베르게
ⓒ 정민호
하루 동행하기로 한 것이 아닌 만큼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 옆에 붙어서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알베르게가 보였다. 좋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문장을 만들어보겠다. 그리하여 가정법의 동사시제를 떠올리며 끙끙거려 마침내 말했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면, 저기에서 물을 떠다가 드릴게요"라고.

내 말에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땡큐"만 연발한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 계속되는 땡큐에 다시 민망해졌지만, 이날 오전의 경험은 잊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이 길이 왜 아름답다고 하는가? 또 다시 나만의 답을 확인했다. 서로 도와주기에 그런 것이 아닐는지. 낮12시 20분, 24km를 걸어 포르토마린에 도착한 이후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나도 마찬가지. 웃음꽃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이름 발음하기 참 어렵네

외국어 발음을 할 때, 일반명사 따위는 발음을 제대로 못해도 큰 실례가 아니다. 오히려 다들 그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름만큼은 예외다. 당연한 일이지만, 발음을 정확하게 해줘야 하는데 그것이 참 어렵다.

특히 프랑스의 'R'과 'H'발음이 어렵다. 이미 드림팀과 걸을 때 마이키에게 R은 'ㄹ'이 아니라 목이 끊는 소리를 내며 'ㅎ'같은 'ㄹ'을 해줘야 하고, H는 '아쉬'로 발음해야 한다는 강의를 들었지만, 그게 어디 쉽게 되는가?

아침에 친구가 된 할아버지의 이름을 발음할 때도 곤욕스럽다. 이름을 합의(?)해야 했는데 이유인즉 내가 "엘버그?", "에이버그?", "헤리버그?", "헤흐르버그" 등 입술이 다 아플 정도로 참으로 다양한 발음을 하며 헤맸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헤이버그로 하라고(?) 했다. 독특한 이름으로는 브라질친구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름이 '유머'다. 듣는 순간, "진짜?"라고 되묻고 말았다. 정말 어렵기도 하고 웃음이 피식 나오기도 한다. 하기야 그들도 내가 '정'이라고 이름을 말하면, 웃거나 어색해하겠지?

▲ 알베르게의 접근금지구역
ⓒ 정민호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날 머무는 포르토마린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다가 산티아고 100km전이라 순례자들이 붐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왜냐하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순례자 증명서를 주는데 그것은 100km이상을 걸으면 주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걱정이 많았는데,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크게 붐비는 모습이 아니다. 다만, 알베르게 침대가 금방 동이 나기는 했다. 백 개에 육박하는 침대를 갖춘 숙소인데 오후 2시 반에 꽉 찼으니 확실히 다른 셈이다.

100km밖에(?) 남지 않아서인가? 다들 상기된 얼굴로 산티아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대화의 흐름을 10초 정도 늦게 파악하고 있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산티아고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 날 보며 웃는 헤이버그 할아버지와 다시 만난 미츠에, 여전히 한곡만 연주하는 장 마리와 유머, 크리스토퍼, 글라라, 안토니오, 페르난도 등의 이름을 아는 친구들은 물론 이름을 몰라도 소중한 친구가 된 순례자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더 소중했다.

미래보다 함께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더 마음을 주고 싶었기에 이날은 유난히 더 열심히 바디랭귀지를 했다. 무모한 여행 중에 절정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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