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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그로뇨 거리
ⓒ 정민호
로그로뇨의 알베르게를 나선 시간은 오전 8시. 문을 나서자마자 콧등이 시큰거렸다. 전날 축제에서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건가? 고작 열흘 남짓 함께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어쩌면,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만, 드림팀의 멤버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스요시와 마이키, 매튜와 알랑, 그리고 내가 둥글게 서서 악수를 나눴다. 그 안에서 고마웠어요, 땡큐, 메르시, 아리가또 등의 말들이 오고간다. 같은 뜻에도 이렇게 언어가 다양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넘어서, 마음이 우선한다는 것이 와닿았다. 표정을 봐도, 눈빛을 봐도.

터미널로 가야 하는 만큼 내가 먼저 돌아서야 했지만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 가야 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길에 따라 헤어지는 친구들에게 활짝 웃어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엔 카미노!"를 말하고 돌아섰다. 그들도 똑같이 말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 걷는 것이었다.

술 취한 젊은이들이 나에게 달려오고…

감상에 젖어 거리로 나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침까지도 술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체력에 감탄하면서 전날 얻었던 도시 지도를 꺼냈다. 터미널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런데 가는 길이 꽤 애매하다. 평소라면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볼 텐데 이날은 일요일 아침이며 또한 축제 다음날이라 그런지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도에 적힌 스페인어들과 거리 이름을 비교하고 끙끙거리는데 저 옆에서 술병 들고 있는 남자들이 달려왔다. 다른 볼일이 있겠거니, 하고 신경 안 썼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둘러싼다. 맙소사, 그 순간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당황한 나에게 그들이 솰라솰라하며 말을 건넨다.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손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가리키며 산티아고, 라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 또 한번 깜짝 놀라는 순간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이쪽이 아니라고 말해주러 일부러 달려왔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터미널 가는 방향을 찾아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도시 외곽으로 의심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거리에는 시민들이 꽤 불어났기에 터미널을 물었더니 내가 온 방향을 가리킨다. 설마? 다시 시작점으로 왔다. 이곳에서 다시 물었더니 온 길로 다시 가란다. 도대체 뭐지? 세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처음으로 이용한 스페인의 대중교통

▲ 산티아고 가는 길. 레온
ⓒ 정민호
그런 식으로 걷는 것은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만든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지라 지나가던 아줌마 두 명을 붙잡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답이 똑같다! 답답한 마음에 손짓을 섞어가며 세 번을 왔다 갔다 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들이 이해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더니 손을 하늘을 번쩍 올린다. 이건 또 뭐지? 내 눈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신호등이 있었다. 무슨 뜻인가?, 하고 아줌마를 봤더니 아줌마가 생각을 하다가 손바닥을 활짝 펴더니 오른쪽으로 가리킨다.

이 바디랭귀지를 해석해보면, 신호등 다섯 개가 나타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돌라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신호등 숫자만 세면서 걷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커다란 나무판이 내 앞을 막고 있다. 이미 지나치면서 봤던 공사현장이었다. 혹시나 하며 아줌마 말을 믿고 그쪽으로 가봤다. 아뿔싸! 공사현장 끝에 터미널 입구가 있었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혼자 걷는 신고식치고는 톡톡히 한 셈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로그로뇨 터미널에 들어선 순간, 이번에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버스표를 어떻게 구해야 되지? 아니, 어떻게 말해야 하지? 이 사람들은 온통 스페인어만 할 텐데? 부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레온, 이라는 글자만 찾았고 그곳으로 갔다. 레온!, 이라고 외쳤더니 창구 안의 아줌마가 솰라솰라한다. 어차피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 한 터라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아줌마는 친절하게 버스 시간과 비용 그리고 도착 예정 시간 등을 적어주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동양인에게 웃어준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보니 출발시간이 다들 3시 이후다. 왜지? 혹시 아침부터 낮 시간까지 걷는 순례자들 때문에? 생각해보면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특히 도로를 걸을 때도 시외버스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는 많이 보이는데 유독 레온 방면만 새벽 아니면 오후였다는 것이 내 추측을 확신시켜줬다. 확인해볼 겸 용기를 내서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바디랭귀지로 이것을 물어봤다. 하지만 직원이 스페인어만 잘하는지라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집시 할머니 아냐?

버스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터미널 구석에 앉아 있던 흑인할머니가 산티아고를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무슨 티켓을 샀고, 비용은 얼마이며, 시간은 언제인가, 하는 것을 연이어 묻는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을 보니 스페인어도 잘하는 것 같은데 굳이 나에게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을 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 할머니가 이상한 말을 했다. "너처럼 나도 그거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보자기를 든 것만 보니 산티아고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문득 머릿속에서 순례자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집시에 관한 것! 어린애들은 지갑을 감쪽같이 훔치고, 젊은이들은 길을 알려준다며 접근하고, 노인들은 관광객들에게 이상한 약이 든 음료수를 먹인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방심하면 머나먼 외국 땅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대사관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들의 설명은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를 관광할 때로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은 이미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결국 지팡이를 꼭 쥔 채 할머니를 경계하고 됐다. 할머니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을 때, 할머니 자리는 앞이고 나는 뒤쪽이라는 것에 내심 감사할 정도였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운전사가 마이크를 붙잡고 솰라솰라 하는데 부르고스, 라는 단어만 알아들었다. 이미 티켓을 보고 버스가 부르고스를 지나간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한참 후, 버스가 다시 출발하려는 진동소리를 들으며 잘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버스 밖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너, 갈아타야 돼!”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누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나 하고 눈을 떴다. 흑인할머니였다. 그녀는 밖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타고 있는 버스 앞에 버스가 또 있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가 왜 내렸지?, 하는 순간! 헐레벌떡 뛰어야했다.

천사를 만났다고 믿으며

▲ 레온 알베르게
ⓒ 정민호
레온의 알베르게에 도착한 순간에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만약 버스를 갈아타지 못했다면? 그 할머니가 귀찮아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도대체 나는 어디로 흘러갔을 것인가! 그 때는, 산티아고 가는 길 중에 가장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런 만큼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던 걸까?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흑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집시고 어쩌고 하는 것도 그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아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늘을 보는 것조차 창피했다. 쥐구멍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만큼 느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런 곳으로 도망치면 안 되지. 다시는 이런 모습 보이지 않을게요. 도시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을 천사를 향해 인사했다. 고마워요, 할머니. 이런 것들 걷어내고 산티아고에 갈게요. 약속해요. 무모한 여행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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