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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에 의해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이 받아들여진 27일 오후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지인들이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을 방문해서 헌화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975년 2월 21일 박정희는 문화공보부 순시 자리에서 "인혁당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남파간첩이 조직한 것인데, 법무부, 문공부는 뭘하고 있느냐"며 크게 질책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 며칠 전인 2월 15일에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과 학원관계자 4명을 제외한 148명에 대해 형집행정지라는 관용(?)을 베풀어 놓고 다시 누구를 향한 공개경고였을까?

이 살벌한 공개경고가 효과가 있었는지 같은 해 4월 8일 대법원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상고를 기각해 8명의 사형과 8명의 무기징역, 그 외 피고들에게 15~20년 징역형 등을 확정했다. 당시 대법관들(단 1명을 제외하곤)에겐 Amnesty International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군법회의의 '살인의 풍경' 따윈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면관계상 두 가지만 옮겨 적는다.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 1992에서 재인용.)

살인의 풍경 1 한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이 고문을 당했으며, 자술서는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하자 검사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충분히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답하였다.

살인의 풍경 2 한 피고인은 자신의 자술내용을 암기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런데 법정에서 막상 진술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 외었던 것을 잊고 말았다. 그러자 검사가 재빨리 자기가 갖고 있는 자술서의 사본을 읽어주었다. 이에 피고인은 그 문장을 계속 암송하기 시작했다. 이 피고인은 외관상으로도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그는 서 있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절뚝거리고 있었다.

사형이 확정된 8명은 잘 알려진 대로 18시간 후에 전원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런데 최근의 민청학련ㆍ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장에게 발송된 '다음과 같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있었으므로 통지한다'는 형선고통지서가 1975년 4월8일 오전 11시에 내려진 대법원 선고보다 8시간 전인 이날 오전 3시에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됐다는 소인이 찍혔다는 것이다. 가히 복마전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 8인은 죽어가면서 무슨 말을 남겼을까? 8인 공히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이를 믿어야 할까? 특별히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도예종은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해 도예종의 사형집행 장면을 목격한 김모씨는 "도씨는 '통일을 못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 마디만 했으며 적화통일이라는 표현은 사용한 일이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의문사위 조사기록에 나타나 있다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밝혔다.

'통일 못보고 죽는게 억울하다'가 '적화통일 바란다'로...

▲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오충일 위원장이 7일 오후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진실위는 또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모씨는 의문사위 조사 때 "공산주의자가 통일이라고 하면 적화통일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기재했다"고 진술했다가 이번 국정원 조사 때는 "유언을 내 임의대로 쓴 사실이 없다"며 말을 바꿨다고 소개했다. '적화통일'이라고 '생각!'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에겐 마지막 유언을 남길 진실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렀다. 진실위는 12월 7일 발표에서 1964년의 "인혁당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서클 형태 모임"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어 1974년의 "민청학련은 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또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수사당국이 밝힌 '인혁당 재건위'는 "단체의 실재를 입증할 물증이나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는 자백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제 이 수치스런 과거사에 대해 12월 27일 서울중앙지법이 뒤늦게나마 재심을 하기로 결정했으니 재심을 통해 모든 진실이 다시 가려지고 잘못됐다면 합당한 보상(혹은 배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사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비극적인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재심이 잘 이루어지기를 소박하게 바라는 것으로 여기서 얘기가 끝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다. 그녀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혁당 문제도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이렇다는 식"이고, 따라서 그녀가 볼 때 "국정원 진실위의 주장은 정당성이 없"으며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인터넷 국민일보 2005. 12. 8.>

진실위의 발표가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이렇다는 식"이라는 박근혜 대표의 지적은 맞다. 사실 진실위는 박정희가 '사법살인'에 개입해 명령했다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실위의 한홍구 교수는 "유태인 수백만이 학살됐지만 히틀러 명령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박근혜 대표의 주장대로 정황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모함"이라는 주장은 잘못 됐다.

생각해보자. 모든 형사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은 전적으로 국가가 진다. 피의자가 자신이 사기꾼이거나 강도범이거나 간첩이 아니라는 입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진실위의 조사에 의하면 박정희의 '사법살인' 개입을 확인해줄 물증이 없듯이 그들 8인 역시 사형을 당할 만한 죄를 범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있다면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게 발표내용이다. 바로 그래서 재심이 필요한 것이다.

자, 이렇게 국가가 피의자의 죄를 정당하게 입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처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그 자체가 국가의 범죄고 박정희가 그 책임자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것이 "모함"일 수는 없지 않은가? 8인의 사형수는 국가가 그들의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는 한 아무 죄가 없는 것이지만 박정희는 거꾸로 자신이 이 천인공노할 공권력의 범죄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증을 못하는 한 당연히 (고의가 아닌 과실이었다 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박근혜, 그는 죽어간 사형수에 대해선 왜 말이 없나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정원 진실위의 인혁당 조사결과에 대해 "모함"이라며 반발했지만 정작 억울하게 숨져간 8명의 사형수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사진은 22일 오전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굳은 표정으로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는 박근혜 대표.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런데 박근혜 대표는 이 비극적 과거사를 힘겹게 정리해가는 작업이 그저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그녀는 박정희의 직접 개입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말이 많은데, 증거도 없이 죽어간 8인의 사형수와 또한 증거도 없이 고초를 겪은 역사 속 희생자들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할 말이 없을까?

사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 본인은 과거 역사 속 인혁당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은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등의 말을 내뱉는 순간 이제 그녀도 자신의 부친과 함께 정치적 책임자의 지위에 서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부친을 역사 속에서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할수록 자신의 부친과 함께 역사의 구렁텅이에 스스로 빠지는 것임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 대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다. 그들의 사형을 결정한 것은 결국 사법부다. 그래서 '사법살인'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뭔가 잘못됐다면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사법부가 져야 할 것 아닌가?"

그녀가 만약 실제로 책임을 사법부에 돌린다면 그것도 일말의 이유는 있다. 아무리 정치적 상황을 핑계 삼는다 해도 사법부가 모든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면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민복기씨는 재직시 '질서확립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19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아마도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제1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자 '양심상 기소할 수 없다'고 반발한 서울지검 검사들을 힘으로 누른 일과 1975년의 '사법살인'의 역할을 평가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일제 때 경성지법 판사를 역임하여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 예정된 민복기씨의 부친인 민병석 또한 친일로 유명한 인물이다. 민병석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서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에 앞장"(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선 사실이 있다. 어떻게 된 게 우리나라는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꼭 이렇게 '거시기 한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영원히 후학 법학도들의 공부자료가 될 부끄러운 판례를 남긴 당시 대법원 재판부의 면면을 확인해보자. 민복기ㆍ홍순엽ㆍ이영섭ㆍ주재황ㆍ김영세ㆍ민문기ㆍ양병호ㆍ이병호ㆍ한환진ㆍ임항준ㆍ안병수ㆍ김윤행ㆍ이일규 등 13명이다. 이중 이일규 전 대법원장 만이 유일하게 2심 군법회의 재판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소수의견을 냈다. 그나마 만장일치 '사법살인'은 아니어서 조금 위안은 된다.

이제 다시 재심을 담당할 법관들에게 부탁한다. 역사적 재심이 죽은 영혼들과 생존자, 그리고 가족과 이웃들의 피눈물을 모두 보상해줄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억울한 한은 없애주도록,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사법부의 불명예를 말끔히 씻고, 또한 후학 법학도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기억하게 될 훌륭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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