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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법원이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사법부가 간첩사건, 조직사건, 공안사건 가운데 정권 차원의 조작과 고문 등의 의혹이 있는 사건들에 재심사유를 좁게 해석하려는 입장이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번 재심개시 결정은 상당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법원이 재심개시 결정을 내리기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의 기록과 조사내용을 신뢰했던 점도 법의 형식논리보다는 진실규명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재심을 청구했던 사람들은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8명의 유족들이다. 이에 따라 담당재판부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3 형사부(재판장 이기택 부장판사)는 재심 대상이 되는 판결을, 비상보통군법회의가 1974년 7월 11일 선고한 고 우홍선ㆍ송상진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도예종씨 판결, 7월 13일자 선고한 고 여정남씨 판결로 결정했다.

의문사위 조사내용이 재심개시에 결정적 영향

재판부는 결정문의 상당 부분에서 의문사위의 관련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의문사위의 조사내용이다. 결정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의문사위가 직무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로 구성된 기관인 만큼 조사내용에도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의문사위가 조사과정에서 밝혀낸 사실 중 ▲인혁당 재건위 수사에 관여한 수사관들이 "당시 중앙정보부에는 고문을 하는 팀이 따로 있었고,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 점 ▲피고인들이 수용되었던 서울구치소의 교도관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한 사실 ▲함께 재판받았던 다른 피고인들, 피고인들의 가족, 변호인등도 당시 피고인들로부터 수사관들로부터 고문을 당한 사실을 들었다고 진술한 점 등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이 사건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구치소의 일부 교도관들도 위와 같은 진술을 하고 있고, 일부 수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임에도 위와 같은 진술을 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그 진술의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진술이 번복되고 있는 경위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한다. 피고인들이 "같은 해(1974년) 4월 26일경 이전까지는 공산주의나 북괴와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범죄사실을) 부인하였는데, 같은 달 말경 또는 같은 해 5월 초 경부터 중앙정보부 등에서 신문을 받을 무렵에는 공산비밀지하조직의 구성, 구성원, 구체적인 역할분담 및 북괴에의 동조 등 북괴와의 관련성에 대한 부분을 비롯한 범죄사실의 대부분을 자백하였고 기소된 이후인 같은 해 6월 초경에는 모든 피고인들이 진술조서 형식으로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라는 명칭과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모두 자백하였다"는 것이다.

"가혹행위 이외에 자백할 만한 계기 찾을 수 없어"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자백하기 시작한 시기에 특별히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거나 자백할 만한 별다른 사정이 보이지 않는 점 ▲피고인들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는 비슷한 내용의 자백을 하는 등 그 자백의 내용과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는 점 ▲그 자백의 시기가 피고인들이 서울구치소에서 진통제, 항생제 등을 처방받은 시기와 근접한 점 등을 지적한다.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법률상 구속기간의 제한없이 장기간 구금된 상태에서 "수사관의 가혹행위 이외에 달리 피고인들이 진술을 번복하여 범죄사실을 자백할 만한 계기나 사정을 찾아볼 수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또한 "피고인들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 외에는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번 재심청구를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증명된 때"(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제422조)에 해당한다고 보아 재심개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재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수사기관이 당시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들을 기소한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위반 등이다.

다시 말해 "피고인들은 인혁당 재건을 위해 공산비밀지하조직인 경북지도부와 서울지도부를 결성하고, 서울지도부의 지도 하에 전국적 규모의 학생데모를 유발시켜 민중의 호응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데 중심체가 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하여 그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내란을 예비음모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고, 대한민국 헌법 및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를 비방하고, 민청학련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등 긴급조치를 위반하였다"는 것이 범죄사실의 요지이다.

재판부는 재심사유를 판단하면서 의문사위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고문에 의하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진상을 규명하였으나, 전격적인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이유, 수사단계에서 사체 처리까지 지시가 내려지고 집행이 이루어진 구조 등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관하여 재조사할 것을 정부에 권고한다"는 내용의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온 이상, 진상규명의 주체는 더이상 의문사위나 정부의 몫이 아니다. 인권의 최후보루라 일컫는 사법부가 주체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법정이 진실을 밝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번 재심 개시결정 자체가 곧바로 무죄와 같은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른 판단이다. 하지만 과거 군사정권 아래서 행해진 조작, 고문 의혹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사법부의 역할이 시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법원을 주목하고 있다. 재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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