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19일, 유엔총회 전체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여는 길'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6월 항쟁' 전후, 빈들교회 지하 사무실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국민운동본부와 대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졌고 그만큼 감시망도 촘촘해졌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직선제의 설렘으로 프린트를 나르고 유인물을 박았다. 그러다가 선거 일주일 쯤 남은 시점에서 덩치 큰 각목 사내들이 들이닥쳤고 우리 사무실은 초토화가 되었다.
대흥동 성당 앞에 진을 친 집권당 트럭에서 대학생들이 유인물 한 뭉치를 받은 게 시초이다. 자기네 편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챈 사내들이.
"거기 섯! 붉은 앙마놈."
고래고래 쫓아왔는데 하필 대학생들이 민교협 지하 계단으로 도망친 것이다. 송대헌 등 해직교사들이 집기를 쌓아 출입문 봉쇄 바리게이트를 설치했으나 발길질 한 방에 우당탕탕 날아가 버렸다. 각목이 터지고 시뻘건 난로 뚜껑이 비행접시처럼 어른거렸다. 그 날짜 대전 신문에는 '민정당원과 해직교사들의 난투극'으로 기사화시켰으나 우리들은 진짜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그날 밤 송대헌이 포장마차에서. "내가 때렸지. 내 아랫배로 놈들의 주먹을 때렸고 내 옆구리로 걔네들의 각목을 때렸지." 구치소에서 목발을 짚고 나온 최교진은 목발을 빼앗긴 채 얻어맞은 후.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을 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부은 발등을 쓰다듬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전신주 그림자가 우울히 흔들리는 '태풍 전야의 겨울'이었다.
후보단일화의 실패로 대통령은 집권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학생들은 도청 앞에 모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며 투표함 사수를 결의했으나 노태우 후보가 당선 결정되면서 어두운 골목길로 총총히 몸을 감췄다.
그리고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러 강산이 서너 번 바뀌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의 시인 정영상이 심장마비로 먼저 떠났고 윤중호와 유상덕 선배는 췌장암으로 하늘나라에 안착했다. 빈들교회 1층에서 밥상을 차려주던 장재인, 최영애 부부와 아들 장호는 세상을 떠났다. 주말부부로 살던 최영애 선생과 장호(4세)가 교통사고로 강물에 잠기자 장례식 마지막날 장재인도 유서를 쓰면서 벗들 모두 <섬강에서 하늘까지>의 영화 스크린으로만 남게 되었다. 남은 벗들은 교육자가 되고 작가나 출판쟁이가 되었다가 정념퇴임의 경계에서 오르내리니 가없는 세월이다. 지금은 가끔씩 가물가물해진다.
강병철
소설집 『비늘눈』 『엄마의 장롱』 『초뻬이는 죽었다』 성장소설 『닭니』 『꽃 피는 부지깽이』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발간, 시집 『호모 중디아피엔스』 『사랑해요 바보몽땅』 등과 산문집 『선생님이 먼저 때렸는데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 『작가의 객석』 등 발간, 교육산문집 『난, 너의 바람이고 싶어』 『넌, 아름다운 나비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편집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공유하기
각목 든 사내들이 사무실로... 태풍전야 같았던 그 겨울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