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기각' 피켓들고 행진하는 보수단체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1가 사거리 일대에서 '제11차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가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 성조기 등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기묘한 존재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 망상을 '입증'하려고 기를 쓰니 말이다.
최근 '태극기 집회가 촛불을 꺼버렸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지난해까지는 탄핵 찬성 여론이 훨씬 높았으나, 어떤 이유로 상황이 반전되었다는 주장일 터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유튜브 등을 보면 이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는 글, 사진, 동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뭔가 해 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왜 그리들 헛심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론조사 기관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주기 때문이다. 촛불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지난해 12월 초, 10명 중 8.1명이 탄핵에 찬성했었고, 1.4명이 반대했었다.
'상황이 뒤집혔다'는 현재,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2월 10일 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탄핵 찬성자는 10명 중 7.9명, 반대자는 1.5명이었다. 탄핵 반대 여론이 1%p 올랐고, 찬성 여론이 81%에서 79%로 2%p 떨어졌다는 사실이 '촛불이 꺼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할까?
여기서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묻는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드려야겠다. 앞의 여론조사는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3.1%p였다. 앞의 1~2%p 변화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월에도 10명 중 8명이 탄핵에 찬성했고 1명 반이 반대했으며, 현재도 10명 중 8명 가량이 탄핵에 찬성하고 있고, 1명 반이 반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태극기가 촛불을 꺼버렸다'는 주장은 현실을 드러내기보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의 소망을 드러낼 뿐이다.
한국사회의 경이로움 앞의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꽤 놀랐다. 지난 두 달 사이에 찬성 비율이 일정 부분 떨어졌으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의 판단을 바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은 아니다. 두 달이라는 기간은 시민들이 서서히 지치고 무감각해지기 쉬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매주 촛불 시위가 열렸고, 거의 매일 탄핵심판에 대한 보도가 나왔으며, 거의 매시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뉴스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언론학에서 '중독에 의한 역기능(narcotizing dysfunc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다. 특정 문제에 대한 보도를 집중적으로 장기간 내보내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참여가 오히려 떨어지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나 부정적인 소식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신념이 약하거나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서가 아니다. 이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 본능' 기제에 가깝다. 기쁘지 않은 소식을 장기간 접할 때 사람들은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의 탄핵 여론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 경이로운 일이다. 두 달 넘게 지배적 탄핵 여론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줄까?
첫째, 시민 대다수가 탄핵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소수가 헌법 유린 혐의자를 지지하면서 태극기를 흔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탄핵 찬성여론이 아니라 태극기의 품격뿐이다.
둘째, 국민은 현재 매우 큰 집중력과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정신적으로 매우 큰 스트레스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버티기'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뿐 아니라 국민의 정신 건강에도 심각한 위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신승리'의 방편이 된 '가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