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물을 방류하는 도암댐. 해체되어야 마땅하다.강기희
도시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벌써 4년 째를 맞았다. 고향에서 산 기간보다 떠돌아 다니며 산 세월이 더 길었다. 그나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아직도 고향을 바라보며 수구초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애초 시골 행을 결심할 땐 마음 편한 곳에 작업실 하나 만들어 놓고 평소 쓰고 싶은 소설이나 원없이 써보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 작심은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과 같았다. 세상 일에 관심많은 버릇을 시골에 온 후로도 버리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고무신 기차 타고 맘껏 여행하던 강변은 어디로
그러한 탓에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 못한 작품이 몇 개나 되었다. 완성되지 못한 소설은 철저히 외면했다. 컴퓨터 안에서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부터 질끈 감았다.
고향 땅인 강원도 정선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은 곳이었다. 높고 깊은 산은 많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골짜기는 맑은 물을 끊임없이 흐르게 했다. 물길을 따라 골짜기로 찾아든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화전민들의 삶은 곤궁했지만 행복했다.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다.
정선 사람들을 지켜낸 힘은 정선아라리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선아라리는 정선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리다. 산촌에서의 힘겨운 삶을 견뎌낸 것도 정선아라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리랑의 시원이라 평가 받는 정선아라리는 전해지는 가사도 많다. 가사만 봐도 고단한 우리네 역사가 고스란히 확인된다.
정선의 또 다른 별칭은 무릉도원이다. 무릉도원인 정선 땅에서 조용히 소설만 쓸 수 없게 만든 것은 동강이었다. 오래 전 정선을 휘감아 도는 강의 이름은 동강(桐江)이었다. 조양강이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오동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동강이나 햇살이 곱게 퍼지는 조양강이나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면서 그 이름값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릴 적 강은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면 강으로 먼저 나갔다. 흘린 땀을 씻기 위해 뛰어 들었던 곳도 강물이었고, 밤 목욕을 나간 곳도 동강이었다. 그 시절의 강물은 헤엄을 치다 물을 먹는다 해도 억울할 일 하나도 없었다. 큰 맘 먹고 산 유리어항을 들고 천렵을 나갔던 곳도 마을과 마을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동강이었다.
그 시절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는 송장 꼬내기였다. 송장 꼬내기는 명주잠자리 애벌레로 모든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였다. 송장 꼬내기는 돌 밑바닥에 서식하는 수서곤충으로 수중 생태계의 바로미터와 다름 없었다. 당시만 해도 작은 돌 하나만 들춰내도 송장 꼬내기가 서너 마리는 너끈히 달려나왔다.
꼬내기를 잡아 어항 입구에 짓이겨 놓고는 고운 모래가 펼쳐진 백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경험상 30분 정도면 어항이 가득찰 정도로 물고기가 들었기에 그 시간까지 모래사장을 뒹굴며 놀았다.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놀다가 그래도 심심하면 고무신의 뒤축을 뒤집어 기차놀이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무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기차놀이였지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차놀이를 했다. 우리는 낡은 고무신 기차를 타고 서울로도 가고 평양으로도 갔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고무신 기차는 그 시절 더 큰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