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달 11일 '라디오21 개국기념 리셉션 및 후원의 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갑수 라디오21 전 대표이사.
지난달 11일 '라디오21 개국기념 리셉션 및 후원의 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갑수 라디오21 전 대표이사.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현재 라디오21은 공중파 방송국에서 100명이 할 일을 21명이 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많지만, 제가 인복이 많아 동지이자 식구들이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달 11일 저녁 서울 무교동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는 '라디오21 개국기념 후원의 밤'이 열렸다. 내빈들에게 직원들을 소개하던 김갑수 당시 라디오21 대표이사의 눈동자에는 어느 순간 눈물이 맺혔다.
관련
기사
' 노무현 라디오 ' 1인3역 김갑수씨 "진보적 인터넷 라디오방송 만들 것"

라디오21(www.radio21.co.kr)은 전날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 '김갑수 대표와 라디오21 평사원과의 대화'가 방송되기도 했다. 대본에 따라 '대통령과 평검사의 대화'를 패러디한 쇼였지만, 경영자와 직원들 사이에 의사소통 과정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이벤트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 대표와 직원들의 갈등이 현실화된 상황에 노사 모두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15일 김씨의 갑작스런 사의 표명과 16일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17일 직원들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청취자들도 어리둥절해 있다.

자세한 내막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청취자들 사이에서는 "김씨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있어 사퇴했다"는 억측부터 "개혁세력의 분열이 시작됐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석이 나오고 있다. 도대체 라디오21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ADTOP3@
개국 리셉션 전날 패러디토론 '김갑수 대표와 평직원들의 대화'가 방송됐다.
개국 리셉션 전날 패러디토론 '김갑수 대표와 평직원들의 대화'가 방송됐다.
라디오21은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인터넷 선거운동 방송 '노무현 라디오'가 효시가 됐다. '노무현 라디오'에 대한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을 얻은 김씨는 24시간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구상, 투자자를 모으고 여의도에 소규모 방송스튜디오를 마련했다.

개국에 앞서 한 달간 매일 두 시간씩 시험방송을 거친 것만으로 모든 준비가 끝날 수 있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라디오21은 2월21일 오전9시 첫 방송을 내보내며 힘차게 출발했다.

그러나 두 달간 라디오21을 이끌어온 김씨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내부사정에 정통한 라디오21의 한 관계자는 "설립초기부터 회사를 회사답게 이끌지 못한 김씨의 어정쩡한 태도가 문제를 키웠다"고 단언한다.

"패러디토론은 장난이었지만, 김 대표가 회사 설립 후 회사를 회사처럼 운영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직원들을 적당히 다그치면서 위계질서도 잡았어야 하는데, 직원들에게 너무 편하게 대하다보니 라디오21이 시민단체인지 회사인지 혼동되는 흐름까지 감지됐다."

김씨가 직원 MT 및 워크숍(3월28∼29일)을 계기로 이 같은 분위기를 다잡으려고 했지만, 김씨의 돌연한 태도변화는 직원들 눈에 권위주의적으로 비쳐지게 됐다. 익명을 요구한 라디오21 직원은 "김 대표가 경영이면 경영, 방송이면 방송... 한 가지에 매진해야 했는데, 하루 4시간씩 방송진행을 맡으면서 경영까지 함께 하려는 욕심이 지나치지 않았나?"라고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회사 내부에 잠복되어 있던 갈등은 김 대표가 4월 들어 일주일간 방송을 펑크내면서 표면화됐다. 직원들은 "김씨가 회사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신분이 아니라면 이런 무책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냐?"며 김씨의 책임을 물었다.

@ADTOP5@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김씨 역시 할 말이 있다. 김씨는 이즈음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방송마저 뒷전에 밀어두고 백방으로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 뛰어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가 갑자기 방송을 펑크내는 사정을 직원들에게 사전에 제대로 알리기만 했어도 직원들과의 반목은 피할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이다.

김씨는 14일 경영권자의 권한으로 전 직원의 사표를 요구했다. "경영사정이 어려워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설명했지만, 직원들의 눈에는 "충성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고시키겠다"는 엄포로 다가왔다.

김씨의 구조조정 추진에 직원들은 15일 80% 이상의 출근 및 방송제작 거부로 맞대응했다. 이날 종일 파행방송이 이어지며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김씨는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대표이사 직을 사임했다. 사임하는 과정에서도 김씨의 주식지분 반납을 놓고 김씨와 직원들은 또 한번 갈등을 표출했다.

김씨의 사표를 계기로 갈등을 일단 봉합한 라디오21은 김씨가 진행해온 '뉴스21'과 '뉴스플러스'를 음악방송으로 대체하고, 방송 정상화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씨의 사퇴로 이어진 이번 사태의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련의 사태 전개에 분개한 일부 이사들은 "김씨가 책임을 지고 물러난 만큼 직원들도 전원 징계위원회에 회부해서 선별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원들의 노조 결성은 이 같은 급박한 흐름 속에서 이뤄졌다. 사태가 더욱 악화될 조짐을 보이자 비대위는 "징계 문제는 차후 노조와 협의해 처리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가장 큰 문제는 라디오21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김갑수의 공백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메울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김씨는 방송진행자와 대표직을 사임하며 회사 진로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비상대책위원회에 넘겨주고 손을 뗀 상태이다. 김씨는 "내가 다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갑수씨는 방송을 그만뒀지만, 김씨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소개화면은 홈페이지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김갑수씨는 방송을 그만뒀지만, 김씨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소개화면은 홈페이지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이승교 부사장은 "사실 문제는 간단하고, 해결책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불신이 커져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고 개탄했다.

이 위원장은 "중요한 것은 방송을 계속하는 것이다. 라디오21이 개인 회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김갑수 개인의 명망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직원들과 김 대표가 언젠가 서로 마음을 열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마지막 신뢰까지 깨져버리면 앞으로 함께 못한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노사간의 중재 역할을 하고 있는 서영석 사외이사도 "조그마한 감정 싸움이 이렇게 됐다. 그러나 투자가 잘 되고 회사의 비전이 명쾌하게 제시됐다면 아무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가수 신해철씨는 '라디오21 후원의 밤' 행사에서 "앞으로 라디오21은 뺑뺑이 치며 가시밭길을 가게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라디오21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언젠가 라디오21에 합류하겠다"던 그의 약속이 지켜질 지는 미지수다.

출범 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한 차례 좌절을 보여준 라디오21의 현주소는 '개혁의 상품화'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