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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라디오'로 새로운 형태의 선거 운동을 펼쳐 온 방송인 김갑수씨. 김씨는 대학시절 노 당선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뒤, 올해 좋아하던 방송까지 접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아 왔다. 그의 마지막 꿈은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국을 만드는 것.
'노무현 라디오'로 새로운 형태의 선거 운동을 펼쳐 온 방송인 김갑수씨. 김씨는 대학시절 노 당선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뒤, 올해 좋아하던 방송까지 접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아 왔다. 그의 마지막 꿈은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국을 만드는 것.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통령을 만든 목소리'.

그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들 입을 모아 그를 이렇게 부른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한 구석에 조그만 라디오 방송국 '노무현 라디오(www.Radioroh.com)'를 열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선거운동'을 시도한 방송인 김갑수(35)씨. 노 당선자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은 노 후보가 '당당한' 대통령 당선자로 올라서는데 그의 방송이 '단단히' 한 몫을 해 냈다고 인정하고 있다.

지난 11월 4일 인터넷을 통해 첫 방송을 내보낸 김씨의 '노무현 라디오'는 양강 구도의 아슬아슬한 대선을 거치며 일약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12월 26일 현재 그의 '노무현 라디오'는 웹페이지 순위 사이트인 랭키닷컴(www.rankey.com) '라디오 방송국' 분야 순위에서 기독교방송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

김씨가 PD, 엔지니어, 라디오 진행 등 1인 3역을 해내며 이끌어온 그 방송이 이제 45일이라는 짧은 방송 기간을 끝내고 문을 닫았다. 지난 12월 25일 밤 10시, 김씨는 여의도 민주당사 1층 방송실에서 청취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방송을 끝냈다. 수많은 애청자들을 뒤로 한 채 방송국을 닫는 그의 아쉬움, 또 새로운 포부는 무엇일까.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노 당선자 승리 확신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잘 나가던 방송 때려 치고 노 당선자를 지지하며 이 일에 뛰어들 때, 주변 친구들이 '야, 너 참 멋있게 산다',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반어적 표현이죠. 사람들 눈에는 가능성도 없는 일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실제로 당시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거든요."

마지막 방송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만난 김씨는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지지율 하락과 후보단일화,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 등 급박했던 대선 순간들을 숨가쁘게 전하며, 때때로 눈물을 흘리거나 격한 호소를 토해내던 '라디오 진행자' 김씨는 불과 일주일만에 평범한 일상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죠. 악당들에게 밟히더라도 결국은 승리하지 않습니까. 이번 대선 '영화'의 주인공은 '노무현'이었고, 저는 그 주인공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아무런 주저 없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을 맡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한 그의 '변신'에 대해, 김씨는 이렇듯 '주인공론'을 폈다. '정권교체론'과 '세대교체론'이 맞붙은 이번 대선은 김씨의 표현 그대로 반전과 반전이 이어진 한편의 영화와 같았다. 노 당선자는, 올 한해 동안 그 숱한 어려움과 난관을 뚫고 '대통령'이라는 고지를 점령해 낸 것이다.

이처럼 김씨가 노 당선자를 이번 세대교체의 '주인공'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인연 때문은 아니다. 김씨가 노 당선자를 믿고 선거판에 뛰어든 것은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노 당선자 처음 만난 것은 88년 총선, '투표소' 자원봉사로 시작"

"제가 노 당선자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시절인 지난 88년이었죠. 당시 재야변호사였던 노 당선자가 부산 동구에 출마했을 때 투표소를 지키는 선거운동원으로 자원봉사를 한 것이 첫 인연이었습니다. 노 당선자는 당시부터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죠. 그 때 자원봉사 하면서 상대편 허삼수 후보 운동원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부산대 86학번인 김씨는 이미 지난 88년에도 노 당선자와 함께 선거를 치렀다. 비록 혈기왕성한 대학시절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15년 전부터 노 당선자와 함께 선거운동을 해본 셈. 이후 김씨는 바쁜 학교생활로 노 당선자와의 인연을 잠시 접고 졸업 전인 91년 방송 진행을 하다 늦깎이로 군에 입대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군 생활을 '육군 선봉예술단'에서 했죠. 그 때 내 보직이 'MC'였는데, 저를 가르친 '사수'가 바로 방송인 홍록기였습니다(웃음). 구준엽, 강월래 등 클론 멤버들도 그 부대 출신입니다."

93년 제대한 김씨는 라디오 진행자로 돌아가 KBS, MBC, PSB 등 방송3사를 거치며 음악방송과 시사프로를 진행했고, 99년에는 작은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학창 시절 '운동권' 선배로 현재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정윤재(현 민주당 사상구 지구당위원장)씨를 만나면서 노 당선자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됐다.

PSB 라디오 진행자로 있으면서도 올해 지방선거, 8·8 보궐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 수행팀장, 공보팀장을 맡았던 김씨는 지난 9월, 노 당선자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당내 구세력이 노 후보를 거침없이 흔들어대자 과감하게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고 상경했다.

"그 때부터 준비해서 11월 4일 '노무현 라디오'가 문을 열었죠. 처음에는 낮 12시부터 2시까지, 저와 김경련 작가 둘이 힘을 합쳐 2시간씩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반응도 좋고, 지지율도 올라가서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도움을 부탁했죠. 시간도 점차 늘려갔고."

그렇게 김씨에게 불려나온 사람들이 인기가수 신해철과 이정열, 손병휘. 그리고 개그맨 노정렬씨. 낮 2시간을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마지막 방송 때는 모두 10시간으로 늘었다.

"모두들 고맙고 미안하지만, 특히 가수 이정열씨에게 더 미안하죠. 이번에 4집 앨범이 나왔는데, 이 일 때문에 앨범 홍보도 제대로 못하고…. 앨범도 많이 못 팔렸다는데, 우리가 사 줘야 하는 것 아닌가?(웃음)."

후보단일화와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 '울음바다'로 변한 방송실

'노무현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김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11월 25일과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이 있던 대선 전날. "'단일화'했던 날도 울었고, '지지 철회' 했던 날도 울었다"며 김씨는 당시의 느낌을 전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던 날, 저는 부산에 내려가 있었죠. 그런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노무현 라디오' 게시판에 청취자들이 '김갑수 나와라'하고 난리가 난 겁니다.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에 예약돼 있었는데, 심상찮은 상황을 보고 밤 11시에 승용차로 부산을 출발했죠."

부랴부랴 서울을 향해 오던 차안에서 김씨는 한 기자로부터 "단일 후보로 정몽준이 됐다"는 반 농담의 거짓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핸들을 잡은 손도 부들부들 떨리고…, 아내도 타고 있었는데, 사고가 안 난 것이 천만 다행이었죠. 그러다가 산청휴게소에서 노 후보로의 단일화 소식을 들었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곧장 방송실로 가서 새벽3시 특별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후보단일화 하던 날의 눈물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18일 밤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은 김씨에게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국민통합21에서 속보가 왔다고 김 작가가 방송 도중 글자를 써서 보여주더군요. 그 글을 본 순간, 분노로 목소리가 다 떨리고…, 하도 어이가 없어 노래를 틀고 마음을 진정시켰죠. 그리고 청취자와의 전화 데이트 중 '차라리 잘 됐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청취자들이 항의도 했죠. 아직 모르는 거라고. 그러나 나는 '잘 된 것 아니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할 말을 못하고 산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항의하는 팬들에게 얘기했죠."

정규방송을 마치고 만난 명계남, 문성근씨도 낙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여의도 한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두 사람과 함께 예정에 없던 새벽 방송을 시작한 김씨는 '눈물 바다'를 이뤘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방송이 끝난 뒤 문성근, 명계남씨를 찾으니까 여의도에서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그래서 새벽에 들어와 정규 방송시간도 아닌데, 함께 '음주 방송'을 했습니다. 그 때 명계남씨가 갑자기 문성근씨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문씨가 울고…, 뒤이어 다들 울음바다가 됐죠."

그러나 마냥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김씨는 즉시 분위기를 바꿔 "청취자들은 모두 거리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정 대표의 지지 철회로 전국 곳곳에 '불법 유인물'이 나붙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

"새벽 1시30분부터는 '밖으로 나가자'는 기조의 긴급특별방송으로 전환했습니다. 불법 부정행위가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차단하기 위한 활동으로 들어가자'고 호소했죠. 이 때 동시접속자가 1만 여명이 넘었습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맞짱'뜨겠다", 진보적 라디오방송 선뵐 예정

그리고 운명의 19일, 노 당선자는 온갖 어려움을 뚫고 '국민 대통령'으로 당선돼 김씨와 지지자들에게 보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노 당선자를 믿고 선택해 준 국민들이 고맙고, 함께 고생한 신해철, 이정열, 손병휘, 노정렬씨, 후배 이선영, 김경련 작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들 하나 믿고 평생 찍어오신 1번을 2번으로 바꾼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려야죠."

25일로 '노무현 라디오'를 끝낸 김씨가 가진 앞으로의 꿈은 이 방송을 능가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것. "순수 종이신문에 한겨레, 인터넷뉴스에 오마이뉴스가 있다면, 진보적인 인터넷 라디오 방송에 '김갑수'가 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대선 후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맞짱을 뜨겠다'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차근차근 동지들을 모아, 정말 훌륭한 인터넷 라디오방송을 만들려고 합니다. 처음엔 어렵겠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다고 나서고 있으니까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후원금들 많이 내 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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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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