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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를 듣고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준비했다. 그래서 알베르게에서 나온 시간은 오전7시. 상당히 늦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하늘은 캄캄하다. 더군다나 내리는 비도 만만치 않다. 이날 목적지가 같은 나와 미츠에는 어둠을 헤치며 함께 길을 나섰지만 쉽지가 않다. 산길인데다 물웅덩이가 널려있는지라 한걸음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위태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다른 순례자들의 손전등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험난한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손전등은 필수다. 민망하게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나로서는 그 사실이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이날은 유독 날씨도 쌀쌀하다. 스페인이라는 이름을 무조건 강렬한 태양과 동일시하던 나로서는 이것도 큰 부담이다. 도대체 왜, 스페인은 일년 내내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그나마 긴 팔 옷 하나 준비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나, 외국어 공부할거야!

▲ 순례자들
ⓒ 정민호
2시간쯤 걷다보니 비가 그쳤다. 그제야 주위 풍경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는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그런지 동서남북이 모두 아름답다. 미츠에와 함께 “뷰티풀!” 타령을 하며 걷는데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부침개처럼 생긴 것을 내민다. 그냥 주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받았더니 설탕통을 꺼내서 도배를 하듯 부침개를 하얗게 만든다.

한입에 꿀꺽했는데, 이야! 그야말로 꿀맛이다. 에너지를 충전하고 걷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아뿔싸! 왜 돈 안주냐고 말한다. 이런! 도대체 왜 그것을 공짜라고 생각했을까? 가격은 0.5유로. 엄청난 바가지지만 꿀맛인지라 기분은 좋다. 돈을 계산하고 나니 미츠에는 이런 경험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고속도로 가다보면 오징어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다고 해줬더니 막 웃는다.

미츠에가 난데없이, "코리안 탕!"이라는 말을 한다. 웬 코리안 탕? 내가 이해를 못하자 미츠에는 탕에 들어가는 것들을 일일이 설명한다. 알고 보니 그것은 삼계탕! 한국에 한번 와봤던 미츠에는 그 맛에 반했다고 한다. 아, 삼계탕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는구나. 웃고 말았다.

문득, 걸으면서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집 생각이 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 생각이다. 갑자기 왜 이리 감상적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그랬다. 나만 이렇게 좋은 걸 보고,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해도 되는 걸까?

그때 나는 외국어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했다. 언제일지 모르더라도 언젠가 어머니가 여행하시면, 어머니가 더 많은 걸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야 바디 랭귀지 갖고 다닐 수 있다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지. 공부해야겠다. 스페인 높은 곳에서 또 하나의 결심을 했다.

외국어 하기 힘들지?

▲ 알베르게 내부
ⓒ 정민호
낮12시 40분, 목적지인 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했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놀랍게도 4인 1실이라 굉장히 아늑하다. 나는 미츠에와 독일에서 온 크리스토퍼, 영국인 할아버지 찰스와 한 방을 쓰게 됐다. 샤워와 손빨래를 한 뒤에 미츠에에게 빌린 바늘과 실로 가방을 꿰맸다. 이것으로 가방의 찢어진 곳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하는 터라 무작정 하고 있었다.

방안에 홀로 남아서 실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샤워를 하고 온 찰스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이 할아버지는 일전에 내가 프랑스 파리 전철노선을 보며 끙끙거릴 때 도움을 준 굉장히 친절한 신사다. 왜 그러냐고 봤더니 다짜고짜 “외국어 하기 힘들지?”라고 묻는다.

아,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입을 막아버린 것이 맞다. "정말 힘들어요"라는 말을 할 뻔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방에서 솰라솰라 하는 소리만 듣다보면,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친절하고 배려해준다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내 침묵에 찰스 할아버지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나도 스페인 말 이해 못해!”라며 주먹을 불끈 쥔다. 나를 향해 용기 있다고, 그러니 더 힘내라고 말한다. 콧등이 시려온다. 외국에 간지 이십 여일이 다 되는 날, 또 다시 감상적인 날을 보내고 말았다.

겨우 그거 한 장 갖고 다녀?

▲ 트리아카스텔라
ⓒ 정민호
미츠에에게 가이드북을 빌렸다. 그동안 마을이름과 알베르게 침대 숫자 정도만 적힌 종이 한 장 달랑 갖고 있던 내게 그것은 커다란 도움이었다. 미츠에는 그런 내 모습에 놀란 눈치로 그거 한 장 갖고 다녔다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까 막 웃는다. 이런! 그래도 이건 내 보물지도라고!, 라고 말하고 싶은데 유독 ‘보물’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혼났다. 후크선장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바디 랭귀지를 구사한 끝에 겨우 이해시켰다.

가이드북은 정말 친절하다. 알베르게가 없는 마을까지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마을을 찾아갈 때 체크해야 할 사실들까지 알려준다. 가령 슈퍼가 없으니 전 마을에서 먹을 것을 사야 한다는 사실이나 알베르게가 없을 때 찾아가면 좋은 유스호스텔이나 팬션을 알려준다. 책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3만원 정도. 비싼 편이지만, 제법 쓸만한 것 같다.

다음날부터 가야 할 길을 메모한 뒤에 마을을 구경하며 슈퍼를 찾아 나섰다. 언제나 챙기던 바나나와 레몬 등을 사고 나오는데 문득 과자 봉지 하나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유럽에서 과자 먹어본 적은 다른 순례자들이 권할 때 말고는 없었는데 이날은 유독 사 먹어보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가격은 0.9유로. 우리나라의 포테이토칩과 비슷한 모양이다.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사람들과 먹으려고 폼을 잡았는데, 이런! 손을 넣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울랄라, 울랄라! 과자까지 기름기로 가득하다니! 그런데도 이들은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 이 사람들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만 든다.

도둑이 나타났다!

▲ 알베르게
ⓒ 정민호
알베르게들은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는데, 이곳은 거의 규칙이 없다. 문도 열어놓는다.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구조다. 그걸 보면서 도둑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뿔싸! 정말 도둑이 들고 말았다. 시간은 새벽 1시 반. 한참 곤하게 자는데 주위가 시끄럽다. 처음에는 벌써 아침이 됐나 하며 게으름 피우는데 뭔가가 좀 이상했다.

술 취한 마을 사람이 칼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왜 놀라운가? 아무리 칼이라고 하지만, 술 취해서 혼자 들어오다니? 이곳에는 수십 명의 남자들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그렇기에 별다른 문제없이 소동은 끝났고 경찰이 와서 도둑을 데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둑이라기보다는 취객의 주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중요한 장면들을 자다가 놓친 나로서는 이색(?)적인 경험을 놓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잘하면 스페인에서 무용담을 하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태권도 빨간 띠의 위력(!)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궁금해진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마을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순례자들에게 집적거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처벌 자체보다 종교적인 의미가 더 두렵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의 눈총은 또 어떻고? 새벽에 깬 나는,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천장을 보며 혼자 추리해보지만 역시 답을 알 수가 없다. 이때도 얻은 답은 오로지 하나. 외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것뿐이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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