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 김득중 지부장이 "나는 쌍차 투쟁 일곱 번째 희망의 봄을 동료들과 만들어가고 있는 쌍차 지부장 김득중입니다"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있다.
사람들
- 해고 통지를 받기 전까지 쌍용자동차에서 얼마나 근무하셨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1993년도 입사해서 2009년도에 해고가 되었으니까 햇수로 16년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주로 품질 쪽 일을 담당했어요. 차량 결함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수정해 나가는 일이었어요."
- 2009년 4월 8일 정리해고 통보 후 희망퇴직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정리해고 통지를 받을 당시 제가 조직쟁의실장으로 노조에 있었습니다. 희망퇴직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희망퇴직으로 떠나려고 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켜잡을까', '어떻게 멈추게 할까'하는 고민 때문에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조합원들을 만나러 다녔죠."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서 노동조합에서 주로 활동하셨는데, 작년엔 직접 정치참여 의사를 밝히셨어요. 7.30 평택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사실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가 노동자·서민들한테 다가오지 않잖아요. 2012년도 대선 국면에서 모든 후보들이 쌍용차 문제의 국정조사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당선되고 몇 개월 안 되어서 모든 공약들이 물거품이 되었어요. 이때 국정조사 과정을 보면 핵심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쳇바퀴만 도는 수준이었어요. 당시 야당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의원의 '쪽수' 문제와 같은 현실적 이유 때문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좀 했었어요.
이 문제를 누군가는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세월호 사고 후의 과정을 봐도, 누군가는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농민·서민·노동자를 진정으로 대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의 문제인 정리해고 노동자의 문제도, 그 아픔을 갖고 있는 당사자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에 출마하게 됐죠."
- 작년 11월, 사법부가 '쌍용자동차 해고자 153명의 해고무효소송'에 대해 해고는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는데, 그후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지금 파기환송심 재판에 가있는데 일단 파기환송되면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근데 어렵다고 그만 둘 수는 없잖아요. 작년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선정한 2014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쌍용차 정리해고 재판이 1위였어요.
그만큼 대법원의 정리해고 쌍용차 판결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판결이 아니고서는 이런 판결을 낼 수 없다는 게 법조계 다수의 의견인 거예요. 대법 판결 후에 변호사 세 분이 추가로 합류하셔서 현재 9명의 법률대리인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 파기환송심이 끝나려면 꽤 오래 걸리겠어요?"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얘기해 볼 수 있는데, 이미 다뤘던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작년 4월 경, 노사가 맺은 고용안정협약서, 약정서 등등이 있으면 고용안정협약이 유효하다는 것이 대법판례로 나왔거든요. 저희는 상하이차로 매각된 후에 매년 고용안정협약을 썼어요. 이거를 저번 재판 때, 대법 때까지는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번부터는 저희가 심층적으로 환송심에 적용할 예정입니다. 이것 외에도 기존의제를 중심에 두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어서 진행할 생각이에요."
세 번째 굴뚝농성, 왜 또 다시 굴뚝 위로 올라가야 했나- 작년 12월,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공장내의 70m 굴뚝에 올라 세 번째 고공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관련 기사: 목숨 걸고 70m 굴뚝 올랐을 그... 같이 울었다) 올해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내려오기까지 101일이란 시간이 걸렸는데요. 농성에 돌입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저희 해고무효 확인 소송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되고 난 후에 사실은 간부들도, 조합원들도 분노나 울분이 말할 것도 없었어요. 또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정리도 하지 못했었어요. 그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지부 전체에서 회의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단식을 결의했어요. 그런데 시행하기로 한 4일 전에 두 동지가 올라갔어요. 두 동지가 올라가면서 많은 언론을 통해 우리의 메시지가 전해졌잖아요. 사법권과 정치권, 많은 사람들의 무시와 외면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끝내고 싶다는 절박함에 또 다시 굴뚝에 올라간 거죠."
- 두 동지가 굴뚝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기까지, 땅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당시의 심경은 어떠셨나요?"굴뚝에 올라간 동료들과 같은 '절박함'이었죠.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어요. 초창기 딱 굴뚝에 오르고 나서, 굴뚝 보이는 곳에 천막을 치는 것조차도 엄청나게 탄압받았습니다. 긴급행정대책회의라고 하면서 경찰과 시청이 동시에 동원됐어요.
몸으로 부딪치고, 저항하고, 위의 동지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굴뚝 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어요. 매우 중요했죠. 굴뚝 위는 장기간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안 되기 때문에 굴뚝농성 돌입한 날부터 저희도 24시간 농성체제로 운영했어요. 알릴 수 있는 것 최대한 알리고, 빨리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