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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K-456'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찍은 사진
 '로봇 K-456'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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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63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전시장 입구에 걸고 전자매체인 TV와 고전악기인 피아노를 도입한 전시로 서구미술계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전시를 본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세계미술사에서 파문을 던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이고 독창한 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백남준은 왜 1964년 일본으로 갔을까. 백남준은 독일에서 부친 사망 후 250달러 정도로 생활했는데 첫 전시에 당시로는 고가인 TV 13대와 피아노 3대 등을 구입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쓰다 보니 돈이 바닥이 났다. 보다 못한 백남준의 형이 동생에게 돈도 절약하고 일본 전자기술도 배울 겸 일본으로 올 걸 권했다.

그래서 백남준은 1964년 독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백남준 이미 이름이 나 있었기에 당대 최고 엔지니어인 '우치다 히데오'도 만났고, 그를 통해 비디오 편집기를 만드는 데 큰 공로자인 전자기술자 '아베 슈아'도 만날 수 있었다. 백남준은 이 기술자와 손을 잡고 그의 분신 같은 '로봇 K-456'을 만들기도 했다.

이 흥미로운 '휴먼로봇'은 백남준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총동원한 것이었다. 걷는 것뿐만 아니라 배설 기능까지 갖췄고 케네디 대통령 취임사를 읊고 다녀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뉴욕에서 백남준이 전시할 때마다 단골손님이 됐다.

이 '로봇'은 탄생한 지 19년 만인 1982년, '백남준 회고전'이 열린 휘트니미국미술관 앞 메디슨가(街)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형식으로 해체된다. 백남준은 이를 두고 21세기의 재앙이라고 익살을 부렸다. 백남준이 이 로봇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인류가 기술을 통제해야지, 기술이 인류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백남준은 어떻게 뉴욕에 정착했나

로봇 'K-456'과 함께 1964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이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피터무어(Peter Moore)
 로봇 'K-456'과 함께 1964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이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피터무어(Peter Moore)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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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야기를 바꿔, 백남준이 어떻게 미국 뉴욕에 정착하게 됐는지 알아보자.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1964년 미국은 인종 분리를 끝내는 '시민권법'이 제정되어 민주주의가 더 고조되는 시기였다. 1년 전 문화예술계에선 전위예술의 총집합한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이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에 의해 출범됐다.

샬럿 무어먼은 1964년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을 맞아 그 위상을 높이려 두루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존 케이지'와 '슈톡하우젠(독일 전자음악작곡가)'이 백남준을 중요인물로 천거하자 그를 초대키로 한 것이다. 백남준은 1961년 독일에서 공연한 '괴짜들' 중 '머리를 위한 선' 등으로 이미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무어먼은 백남준을 초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케네디공항으로 나갔다. 그때가 백남준이 32살, 샬럿은 31살이었다. 그녀는 그를 크게 환영하며 극진하게 대우했다. 하긴 이런 미인의 간청을 어떤 남자가 거절하겠는가.

백남준은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1달간만 머물려다 정착한다. 하긴 시대를 꿰뚫고 있었던 그가 뉴욕이 세계문화의 중심지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게다가 1963년엔 케이지로부터 미국 초청을 받았고, 독일에서 만난 플럭서스 동지인 마치우나스, 카프로, G. 브레히트, B. 패터슨, 라몽트 영, 엘리슨 놀즈 등도 지원했다.

백남준과 그 주변여성들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 모습.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처음 만났을 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 모습.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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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전기를 보면 흔히 작가의 연인이 회자되는데 백남준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여자가 샬럿 무어먼이다. 둘은 미스터리하다. 1963년 백남준이 동경에 잠시 머물렀을 때 만난 '오노 요코'의 소개로 샬럿의 이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오노와 샬럿은 뉴욕의 한 아파트 룸메이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1964년 이전 독일에서 백남준은 예술파트너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백남준보다 2살 아래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이다. 그녀는 1960년대 초 독일 전위예술계의 프리마돈나였고 백남준이 독일생활에 익숙하지 못할 때 많이 도와줬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주최 국제세미나에 참석해 백남준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이밖에도 일본에서 첫 사랑이었던 동경대 불문과 출신의 '시브사와 미치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었다. 또 4살 아래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도 있다. 백남준은 그녀를 1964년 5월 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점인 쇼게츠 홀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7월 뉴욕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백남준 서거 때 사회를 본 '오노 요코' 등도 있다.

여기서 '시게코'가 뉴욕에 온 다음 해인 1965년에 벌린 악명 높았던 퍼포먼스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뉴욕 전위예술계를 들쑤셨는데 팬티에 붓을 꽂고 그리는 '버자이너(vagina) 페인팅'을 그녀가 선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해프닝은 백남준이 기획한 것으로 남자의 성기론 그걸 할 수 없다며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다.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환상적 예술파트너

백남준은 뉴욕에서 운 좋게 행위음악을 구현할 최고의 예술파트너를 만났다. 그녀의 앞에서 소개한 '샬럿 무어먼'이다. 그들이 꽃 피운 해프닝은 마치 소설 같다.

그럼 샬럿 무어만은 누구인가. 그녀는 배포가 큰 첼로연주자로 그리스조각 같은 몸매를 갖췄고 '줄리아드'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뉴욕에서 무명의 백남준을 호랑이로 만들었고 무어먼 역시 백남준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과 같은 명성을 누리기 어려웠다. 마침 유대인 출신이라 백남준이 유대인 중심인 미국미술계에 접근하기도 쉬웠다.

백남준이 하고 싶어 하는 '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수행할 파트너에게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최고의 미인이어야 하고, 둘째는 최고의 지성인이어야 하고, 셋째는 고전음악연주자이어야 했다. 게다가 옷도 다 벗을 수 있는 과감성도 있어야 한다. 샬럿은 이 조건을 다 갖춘 하늘이 내려준 파트너였다.

백남준은 "샬럿이 없었더라면 난 음악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가 첼로를 연주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섹스와 연결된 적이 없었던 음악을 이제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둘은 서로의 다른 입장과 관점을 존중해줬고 각자의 예술적 재능과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왔다.

무어먼이 옷을 벗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 출신인 무어먼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옷을 벗은 건 아니다. 우연이지만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가 쓴 <백남준의 귀환>과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가 쓴 <나의 사랑 백남준>에도 언급돼 있다.

둘이 만난 지 1년이 된 1965년 5월에 파리주재 미국문화원에서 '표현의 자유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둘은 1년간 호흡을 잘 맞춰 왔기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일 리허설도 잘 마쳤고 그날은 정장을 입기로 했다.

그런데 샬럿이 갑자기 검은 드레스를 호텔에 두고 온 게 아닌가. 개막 30분 전이라 밖을 내다보니 교통체증이 극심해 도무지 갔다 올 시간이 안 됐다. 백남준은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막이 둘둘 말린 걸 보고, 저걸 이브닝 드레스로 입으면 어떻겠냐고 말하자 샬럿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백남준의 설득 끝에 속이 훤히 보이는 비닐을 몸에 두르고, 맨 정신으로는 어려워 위스키를 한잔 하고 프랑스 관객 앞에 섰다. 그들은 환호했다. 격정적 연주가 시작되고 그러나 술기운인지 긴장 탓인지 쓰러지고 만다. 그날부터 그녀는 '나신'의 연주자가 된다.

백남준은 왜 '성'을 주제로 삼았나

1986년 백남준이 1962년에 작곡한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가 쾰른예술협회에서 시연되는 장면. 사진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ve)
 1986년 백남준이 1962년에 작곡한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가 쾰른예술협회에서 시연되는 장면. 사진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ve)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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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백남준은 왜 평생 '성'을 주제로 하는 행위음악을 하려 했나. 백남준은 "문학이나 시각예술에서는 다 허용되는데 왜 음악에만 '성'이 주제가 못 되느냐"며 불만을 토로했고 음악이 다른 장르보다 시대정신에 50년 뒤진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부터 이미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시도했다. 일본의 전위음악가 '시오미 미에코'에게 누드공연을 청했으나 퇴짜 맞았다. 1962년엔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 그녀에게 아홉 겹 팬티를 입히고 스트립쇼 하듯 하나씩 속옷을 벗어 관객 입에 집어넣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나 연주가 아니라 일회로 끝난다.

그리고 그해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를 작곡한다. 이는 혈기왕성한 남자 10명이 벽 뒤에 서 있다가 한 사람씩 성기를 꺼내 종이 벽을 뚫는 해프닝이다. 이 작품은 바로 시연 못하고 1987년 8월 31일에야 쾰른예술협회에서 실행된다. 젊은 남자를 모아놓고 페니스로 벽을 뚫게 하는 백남준의 괴력은 어디서 오나.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1967년 2월 9일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 포스터. 오페라를 섹스 하듯 연주하다
 1967년 2월 9일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 포스터. 오페라를 섹스 하듯 연주하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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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을 주제로 한 연주로 1965년 '첼로소나타 1번'에서는 '성인용'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유명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66년 독일 아헨에서 초연된 바 있었다. 그때도 샬럿은 물론 누드였다. 그러나 1967년 뉴욕공연에서 반응은 전혀 달랐다.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이 전시포스터에 "진지함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음악에서 성을 제거한 건 도리어 음악의 진지함을 해치는 것이다. 음악도 문학도 미술과 동등한 위치의 고전예술이다. 따라서 음악도 음악계의 '로렌스', '프로이트'가 필요해"라고 적었다.

미리 신고한 이 공연, 주최 측도 경찰이 음란한 공연으로 볼 수도 있기에 200명 사람만을 엄선해 초대장을 보냈고 일반인은 입장을 금했다. 그 순서는 1막 '전자 비키니 입기', 2막 '상의 벗기', 3막 '하의 벗기', 4막 '완전누드'로 연주하기였다.

 제3회 뉴욕 아방가르드페스티벌에서 '백남준의 생상변주곡(1964)'를 공연하고 있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무어먼은 생상스의 변주곡을 연주하다 더 과격하고 에로틱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고 물탱크로 들어갔다 나와 젖은 몸으로 연주했다. 후에 무어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이 작업을 즐겼다. 나는 전갈좌이고 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그런데 2막이 시작되고 샬럿이 가슴을 드러내자 사복경찰 3명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그녀의 상반신을 코트로 덮고 즉각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공연의 작곡가이자 제작자인 백남준도 연행됐으나 공연장에 양복 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어 훈방 조치됐고, 샬럿도 나중 풀려났지만 외설혐의로 재판에 붙여졌다.

이 사건은 외설과 예술의 자유논쟁으로 확대되어 미국예술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샬럿이 법정에 서자, 애가 탄 백남준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 예술가뿐 아니라 프랑스 시인인 '장 자크 르벨(J. J. Level)'에까지 편지를 보내 뉴욕주지사에게 그녀의 사면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마침 '르벨'로부터 긍정적 반응이 오자 백남준은 1 다음에 숫자 0을 길게 늘이는 재치 있는 감사의 답신을 보내며 파리에선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부각시켜달라고 말한다. 전 세계 유명전위작가와 예술비평가들도 백남준에게 지지를 보냈다.

빈털터리인 백남준은 더 적극적으로 변호사 비용을 얻기 위해 1968년 뉴욕타운 홀에서 '재판기금모금연주회'를 열었고, 백남준은 누이를 통해 알게 된 가야금연주자 황병기씨를 뉴욕까지 불러내 연주하게 했다. 황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복을 입고 연주했는데 샬럿은 비키니를 입고 자루를 들락날락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단다.

미국법원은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백남준의 말을 받아들여 샬럿에게 유예판결이 내리자, 뉴욕예술계는 환호하며 이 법적 투쟁의 두 승자를 축하해줬다. 그 이후 그녀는 '토플리스 첼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 분야의 아이콘으로 행위예술의 '잔 다르크' 아니 '자유의 여신'이 되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청교도 전통으로 성에 강박관념이 심한 미국사회의 촌스러움을 걷어낸다.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돌 같은 분위기를 휘저어놓고 싶었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삼는 기존사회의 통념을 깨는 예술적 교란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문필가 'G. 바타이유(1897-1962)'도 "성(에로티시즘)은 죽음 속에서도 삶을 찬양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지만 성 혹은 에로티시즘은 생사의 넘어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자 인간이 추구할 행복의 근간이 아닌가.

백남준이 독일에서 신화적 인물이 된 이유

독일 뒤셀도르프 시내전차에 그려진 백남준 얼굴. 그는 독일에서 거의 신화적 존재로 대우받는다. 그의 해학과 풍자가 담긴 말 "너무 완벽하면 신이 화를 낸다"는 문구가 전차에 적혀있다. ⓒ Estate of Nam June Paik(Museum Kunst Palast, Dusseldorf)
 독일 뒤셀도르프 시내전차에 그려진 백남준 얼굴. 그는 독일에서 거의 신화적 존재로 대우받는다. 그의 해학과 풍자가 담긴 말 "너무 완벽하면 신이 화를 낸다"는 문구가 전차에 적혀있다. ⓒ Estate of Nam June Paik(Museum Kunst Palast, Dusseldorf)
ⓒ Nam June 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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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백남준의 예술철학에는 "가장 잘 노는 사람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여기서 잘 논다는 건 일상을 축제로 바꾸며 문화예술을 창조하는 일을 가리킨다. 백남준이 이런 생각을 처음 실험한 곳은 바로 독일이었다.

유럽도 그렇지만 독일은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20세기 내내 놀지 못했다. 게다가 세계대전으로 인한 심적 상처도 컸다. 독일인에게 큰 위로가 필요할 때 느닷없이 동양에서 온 한 예술가가 나타나 천개 손도 모자라는 '천수관음보살'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보이스'와 함께 신화적 인물이 된 이유다.

백남준은 서구의 '합리주의·과학주의·이성주의'가 괴물 같은 나치즘을 낳았다며 서구사회 눈먼 허위의식과 모순을 들통 낸다. 정신과 관념보다는 몸과 일상을 중시하고 야생의 사고와 생명감 넘치는 원시성을 부추겼다. 서구의 이원론적이고 분열적 사고에 동양의 '인간·기계·자연(천지인)'은 하나라는 통합적 사상을 도입한다.

서구철학에서 그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으론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있고, 서구미술에서는 마네, 피카소, 뒤샹 등이 있는데 백남준은 이마저도 뛰어넘었다. 몸과 악기, 시간과 공간,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신체아트'로 시작해 '매체아트'로 또 '위성아트'로 도약하며 '인터페이스'의 개념을 창시한다.

백남준은 TV와 로봇과 기계와도 사람처럼 소통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서구의 룰을 깬 사람이다. 백남준의 얼굴이 독일 뮌헨거리나 뒤셀도르프 전차 위에 새겨진 이유이다. 만약 한국에 어떤 외국작가가 와 우리가 도무지 풀 수 없는 남북문제, 학벌숭배, 지역차별 등 난제를 깨는 예술을 했다면 우리라도 반가우리라.

돈도 섹스도 뛰어넘는 축제적 삶 염원

일종의 '바디아트(body art)'로 백남준과 무어먼에 의해 연주되는 존 케이지 작곡인 '인간 첼로(Human Cello)' 1967. 2013년 국제문화교류재단에서 열린 백남준 특강 때 찍은 사진
 일종의 '바디아트(body art)'로 백남준과 무어먼에 의해 연주되는 존 케이지 작곡인 '인간 첼로(Human Cello)' 1967. 2013년 국제문화교류재단에서 열린 백남준 특강 때 찍은 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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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적 인간의 전형이자 축제주의자인 백남준은 샬럿과 함께 '로미오 남준과 줄리엣 샬롯'이 되어 액션음악으로 '섹스'를 했다. 이런 '바디아트'를 통해 돈에 의해 성이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백남준은 돈과 성에 놀아나는 게 아니라 돈과 성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유쾌하게 놀 줄 아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다.

또한 셔먼 아티스트인 백남준은 지구도 굿판을 벌리듯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인터넷의 기원이 되는 '위성아트'도 발명한다. 그렇게 된 데는 "돈보다 축제가 우선"이라는 그의 철학이 깔려 있다. 백남준과 샬럿은 뉴욕에서 돈 나눠주는 퍼포먼스도 했는데 이 또한 돈은 인간에게 하나의 방편일 뿐임을 시사한다.

백남준은 뉴욕에서 가난한 작가로 살았지만 돈에 대해서는 대범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어려서 캐딜락과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있는 최고 부잣집 아들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친의 재력에는 친일의 행각이 관련돼 있다는 걸 목격하는 등 부자로서 보통사람은 겪을 수 없는 '쓴맛(vanitas)'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1990년 노벨문학상수상자)'는 사랑도 투쟁이라며, 태초의 세상에서 돈이나 사회적 억압 혹은 경제적 차별로 뺏긴 첫 키스와 첫 정사를 되돌려달라고 절규했듯, 백남준도 왜곡되고 위선적인 윤리도덕의 잣대에서 벗어나 진정 인간이 해방되고 축제가 나눠지는 공동체를 열망한 것이리라.

'더그 에이트킨전'과 '백남준 온 스테이지'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11.6-2014.2.9까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전시중인 '백남준 온 스테이지'에서 찍은 사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전시중인 '백남준 온 스테이지'에서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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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온 스테이지(Nam June Paik on Stage)]展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전과 함께 열린다. '존 케이지를 대한 경의(1959)', '머리를 위한 선(1960)', '엘리슨을 위한 세레나데(1962)', '로봇오페라(1964)',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6)',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1969)' 등 백남준의 60년대 주요 퍼포먼스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위 작품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는 음악과 신체와 전자매체가 만나는 '비디오아트'를 낳게 하는 다리역할을 한다. 세계적 미디어학자 '맥루한'도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라고 했지만, '인간 첼로'에서는 인간의 몸이 악기가 되고, 행위음악에서는 연주자의 신체가 노출돼 음악이 시각화된다.

더그 에이트킨
 더그 에이트킨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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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수장작가 '더그 에이트킨']展 또한 같은 장소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연다. '더그 에이트킨(Doug Aitken)는 1968년 태어난 미국의 미디어작가로 사진, 출판, 조각, 영화, 설치, 해프닝, 다채널비디오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부제는 작품명인 '전기기구'이다.

그의 전략은 영화(비디오)의 스토리 전개를 해체하고 복수의 화면을 시간차를 두거나 연기(延期)하는 등 비동시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간성'을 획득한다.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자로, 대표작 '전기기구(Electric Earth)'가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다. [더그 에이트킨 작가 홈페이지] http://www.dougaitkenworkshop.com

덧붙이는 글 |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자 '더그 에이트킨'특별전과 '백남준 온 스테이지'전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11.6-2014.2.9일까지. 입장료 성인:4000원, 초중고생: 2000원 [참고] 홈페이지: http://www.njpartcenter.kr/kr [관람정보 및 교통편] http://www.njpartcenter.kr/kr/about/visit.asp



태그:#백남준, #샬럿 무어먼, #구보타 시게코,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바디아트(BOD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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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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