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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백남준 전문가와 관련자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연대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백남준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백남준 이론가인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초청 강연할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이다.
 백남준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백남준 이론가인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초청 강연할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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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기사인 '재벌가 막내아들은 왜 마르크스에 빠졌을까'에서 소개한 대로, 백남준은 1956년에 독일 뮌헨대에서 공부하던 중 보다 더 자유로운 프라이부르크음대로 대학을 옮겼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작곡가로 남은 '볼프강 포르트너'를 지도교수로 맞이한다.

한번은 지도교수가 백남준에게 작품을 보여 달라고 하니, 백남준이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피아노를 부수려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피아노 부수는 소리도 음악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교수는, 자네는 내 방향과 다른 것 같으니 전자음악 등 새로운 흐름을 찾는 '쾰른라디오방송국(WDR)'에서 일해보라고 추천서를 써준다.

백남준은 이 무렵부터 '듣는 음악'보다 '보는 음악'에 더 관심을 두게 됐다. 이는 음을 빛으로 표현하는, 다시 말해 '음의 시각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별로 없다. 60년대 그의 전시에 이미 TV가 등장하고, 70년대에는 비디오로 피아노를 치면 어떤 화면이 나오는지 그가 실험한 이유이다.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강좌에 참석한 백남준

1957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신음악' 하기강좌에서 강의 중인 슈톡하우젠
 1957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신음악' 하기강좌에서 강의 중인 슈톡하우젠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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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있는 다름슈타트에선 '음악의 바우하우스'라 불리는 국제 '신음악(Neue Musik)' 하기(夏期) 강좌 및 축제가 매년 열렸다. 1946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신음악'의 영역을 개척하고 전위음악과 실험음악을 모색하는 자리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전세계 교수, 학생, 작곡가, 이론가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첨단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이 이 축제에 빠질 리 없었다. 그는 1957년부터 이 축제에 참석했고 거기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전위작곡가 '슈톡하우젠(K. Stokhausen)'을 만났다. 슈톡하우젠은 피아노연주 같은 전통적 화성법에서 벗어나, 음렬과 전자음으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등 음악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작곡가였다.

당시 전위 음악가들은 성공여부를 떠나 '구체음악'과 '전자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백남준도 그랬다. 그래서 피아노 두 대를 사서 그 음을 서로 어긋나게 조율하여 기존 화성음을 교란시키는 등 '엉뚱한' 음악을 즐겼다. 이런 도전과 실험 없이는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해외통신원이던 백남준, 천재 작곡가 윤이상과 만나다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기 강좌에서 참가한 백남준, 윤이상, 프란체스코, 요시오 노무라 1958.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기 강좌에서 참가한 백남준, 윤이상, 프란체스코, 요시오 노무라 1958.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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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57년부터 해외통신원으로 일본의 음악전문지 '음악학'과 '음악예술'에 유럽음악을 알렸고, 1958년과 1959년에는 형이 운영하던 국내 '자유신문'에 구체음악의 창시자 '피에르 셰페르'를 5차례나 소개하기도 했다. 1957년 10월 백남준이 '음악예술'에 기고한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참관기'를 보자.

"슈톡하우젠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고, '힌데미트'는 물론 '스트라빈스키'도 인정하지 않은 '아도르노' 교수는 "현대음악에는 오직 한 길밖에 없다"며 청중과 논쟁을 벌였다. 사람들은 '바흐'를 마지막으로 음악이 종말을 맞았으나 '쇤베르크'가 등장하여 이를 되살려 놨다고들 한다. 이런 와중 속에서 평론가(작곡가) '노노'가 한 말, "개인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예술가는 겸허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또한 거기서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천재적 작곡가 윤이상도 만난다. 1958년 9월 7일 윤이상이 그의 부인 이수자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백남준이 유리 깨지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어울리는지 실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참가자들은 모두 터무니없는 곡을 쓰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장선 선수들이다. 나는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음악을 쓰기 싫고 여기 모인 괴짜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소. 아니 그들보다 더 엉뚱한 짓으로 세인(世人)을 더 놀라게 할 수 있으나 난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머물고 싶고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소.

그러나 여기 같이 있는 백남준은 다행히 머리가 좋고 또 그런 심미안 있는 이 같소. 그는 유리를 깨고 무대 위에서 피스톨을 쏘며 그 유리 깨지는 소리와 피아노소리가 서로 어울리는지 실제로 실험해보려고 하오. 나는 그에게 그 방면의 장래를 맡길 수밖에 없소. 백군 스스로도 음악이라는 용어를 여기서부터 해체시켜야겠다고 말했소."

26살에 만난 존 케이지, 그때부터 시작된 '침묵음악'

백남준 연구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 1984년 코펜하겐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사진
 백남준 연구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 1984년 코펜하겐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을 때 사진
ⓒ 김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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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백남준은 1958년 9월 다름슈타트축제에서 '존 케이지(1912-1992)'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남준은 이후 "나의 지난 14년간 작업은, 결국 다름슈타트의 어느 잊을 수 없는 저녁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충격이 컸다고 한다. 그는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이 예전부터 좋아한 음악인 '쇤베르크'의 제자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기준으로 역법을 만든다. 그를 만나기 1년 전인 1957년을 '기원전(Before Cage)'이라고 했고 그가 죽은 1년 후인 1993년을 '기원후' 1년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절대적 무음은 없다"는 음악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 존 케이지는, 자신의 철학을 담아 내놓은 첫 결과물이 '4분33초'였다. 이 작품은 1952년 동료 피아니스트 '튜더(D. Tudor)'에 의해 우드스탁에서 초연된다. 3악장 악보엔 '조용히(tacet)'라는 악상만 적혀 있다. 4분33초 동안 연주는 없고 관객의 기침소리, 연주장의 정적만 있을 뿐이다.

백남준은 패기 넘치는 젊은 작곡가답게, 또 존 케이지의 이런 침묵음악에 고무되어 당시 음악의 경계를 넘는 음악, 기존음악을 무화(無化)시키는 '무음악(a-music)'에 관심을 둔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시각적 공간성을 도입하려 한다. 그리고 초기작곡 '신라향가'에서 보여준 민족주의적 색채는 던져버린다.

동양철학을 서양음악에 담은 존 케이지

서양에서 소개되고 있는 음양오행 및 주역사전 중 하나
 서양에서 소개되고 있는 음양오행 및 주역사전 중 하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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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는 또한 기존음악의 돌파구로 '주역'과 같은 동양사상이나 '선(禪)불교' 등을 서양음악에 도입한다. 예컨대 '공(空)'과 '무(無)' 같은 불교사상도 음악언어로 바꾼다. 백남준은 처음 이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의 음악회에 참석하면서 거기에 빠져들었고 연주가 끝났을 때 백남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존 케이지는 자신의 음악철학에 대해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의 귀에 들리는 건 대부분 소음이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한다면 소음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가 그걸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를 드디어 알게 된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 가장 자연스러운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백남준도 종종 고전작품을 피아노로 우아하게 연주하다가는 갑자기 피아노를 때려 부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싶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피아노를 칠 때 나는 소리도 음악이지만, 그는 피아노를 때려 부술 때 나는 소음도 음악으로 봤기 때문이다.

'무조성-무작곡-무음악'과 그 계보학

백남준이 쾰른작업실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준비하는 한스 G. 헬름스, 백남준, 실바노 부소티 1959.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백남준이 쾰른작업실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준비하는 한스 G. 헬름스, 백남준, 실바노 부소티 1959.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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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심취했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이 바로 그것이다.

백남준의 '무음악'은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해프닝 아트'의 성격이 강한 이 음악은 '액션음악'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음악은 매사 심각한 독일인에게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줬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아트'는 '비디오아트'로 연장된다. 둘의 공통점은 장벽을 허물고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거기엔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를 하나로 만나게 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런 철학은 80년대 '위성아트'가 발표되고 나서야 이해된다. 다시 말해, 전 지구적 차원의 소통방식인 인터넷시대를 그가 예고한 셈이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초연

'갤러리22' 앞에 서 있는 백남준. 여기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Hommage a John Cage)를 선보인다. '갤러리22'는 당시 화가들이 전시하고 싶은 곳이었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때 사용된 사진을 찍은 것임
 '갤러리22' 앞에 서 있는 백남준. 여기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Hommage a John Cage)를 선보인다. '갤러리22'는 당시 화가들이 전시하고 싶은 곳이었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때 사용된 사진을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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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당시 존경받았던 레지스탕스출신 '장 피에르 빌헬름'이 운영하는 '갤러리22'에서, 1959년 11월경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와 함께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와 '녹음기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초연한다.

녹음기에서는 독일 가곡,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등과 함께 동물소리, 모터소리, 복권당첨이 발표될 때 나는 소리, 사이렌소리 등이 나오고 또한 깡통을 발로 차서 유리판을 깨며, 그 파편이 계란과 장난감차를 치도록 만들어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라는 통념도 없애고 그런 장벽도 허문다.

존 케이지는 여기 참석하지 못했지만 작곡가 윤이상도 훗날 형제처럼 각별한 사이가 된 '요셉 보이스'도 만났다. 이 해프닝에서 백남준은 그만의 특이한 괴력을 발휘하여 피아노 등 악기를 공격하는 행위음악의 선두주자로 부각되는 장을 마련한다.

백남준, 존경하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다?

백남준이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연주 중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1960.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백남준이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연주 중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1960.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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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넘어서려한 것인가. 1960년 백남준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쾰른작업실에서 그의 신작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 느닷없이 무대에서 내려와 눈을 부릅뜨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악명 높은 해프닝을 벌인다.

왜 백남준은 그가 존경하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을까? 해석은 분분하다. 이건 쾰른 지방축제에서 여성이 남성의 넥타이를 자르는 축제의 영향이라는 말도 있고, 수동적인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계획된 제스처 내지 선동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서구의 이성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도발이라는 해석도 있다.

추가하자면 당시 존 케이지가 맨 넥타이는 일본의 선사상가 '스즈키'로부터 받은 것인데 백남준이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넥타이를 잘랐다는 해석도 있었다. 아무튼 백남준은 불교적 '단'의 정신으로, 거장마저도 넘어서려는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1961년, '관객 참여적' 예술 초안 발표

위 초고악보(스코어)에는 1961년 봄 쾰른에서 작성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영어와 독일어로 적혀 있다(Sinfonie[Symphony] for 20 rooms, first sketch, 1961 spring, Cologne, Nam June Paik). 이 악보는 실제로 공연되진 않았지만 이후 해프닝아트의 표본처럼 활용된다
 위 초고악보(스코어)에는 1961년 봄 쾰른에서 작성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영어와 독일어로 적혀 있다(Sinfonie[Symphony] for 20 rooms, first sketch, 1961 spring, Cologne, Nam June Paik). 이 악보는 실제로 공연되진 않았지만 이후 해프닝아트의 표본처럼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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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해, 관객의 참여를 통해 행위음악을 구현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의 '악보(스코어)'도 작성했다. 백남준은 여기서 관객의 자유로운 출입을 전제로 한다. 때로는 예술가가 연주를 하지 않아 관객이 연주해야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 관객이 작가로부터 공격에 받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둔다.

20개의 방 중 어떤 방에는 벽에 걸린 골동품시계가 똑딱거리는 가운데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진다. 녹음기에서는 언어화하기 힘든 소음들, 예컨대 자명종소리나 부엌용구, 유리조각, 달걀껍질 등이 어지럽게 부딪칠 때 생기는 소리도 들린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소리와 소음을 콜라주해 이를 시각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또 다른 방에는 닭장 속에 수탉이 꼬꼬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텍스트를 낭독한다. 관객은 이런 20개의 방을 순회하며 예기치 않은 소리를 접하고 우연한 사건을 경험케 된다. 백남준은 관객 나름대로 작곡도 즉흥적으로 할 수 있도록 종용하고, 이런 방식을 통해 전시와 공연에 참여도를 더욱 높이려 했다.

'괴짜들'에서 '해프닝아트'의 귀재로 등극

1961년 공연된 '괴짜들' 백남준 왼쪽에 작곡가 슈톡하우젠이 보인다. 그밖에도 바우어마이스터, 카스켈, 포이스너, 튜더, 헬름스 등이 참석했다. 이 작품은 1964년 뉴욕, 1990년 샌프란시스코, 2007년에 다시 공연된다.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1961년 공연된 '괴짜들' 백남준 왼쪽에 작곡가 슈톡하우젠이 보인다. 그밖에도 바우어마이스터, 카스켈, 포이스너, 튜더, 헬름스 등이 참석했다. 이 작품은 1964년 뉴욕, 1990년 샌프란시스코, 2007년에 다시 공연된다. 위 사진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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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백남준이 '액션음악' 분야를 도맡아 큰 주목을 받고 그의 유명한 '머리를 위한 선'을 선보인 '괴짜들'에 대해 알아보자. 이 작품은 슈톡하우젠 작곡으로 1961년 가을 쾰른 '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원제가 '오르기날레(Die Originale)'인건 '독립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를 되살려내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게 백남준의 설명이다.

광기 어린 그의 '해프닝아트'는 서구예술가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그 기저에는 그가 동서양에 정통했고 그의 예술적 스펙터클은 그만큼 넓고 깊었으며, 문명 이전과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를 연결시키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백남준의 등장은 서구예술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비선형'과' 비위계'로 서구의 근대서사를 격파한다. 그래서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백남준의 지도교수도 그를 "보기 드문 아주 비상한 현상"이라 했으며, 미국의 저명비평가 '프레더릭 제임슨'도 "백남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징표적 인물의 하나"라고 평가하지 않았던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이란 무엇인가

구체음악의 창시자 피에르 셰페르
 구체음악의 창시자 피에르 셰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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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음악'은 2차 대전 후 1948년에 프랑스의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와 그의 방송동료들의 해서 창안된 것으로 녹음된 다양한 '자연의 소리와 기계의 음향(objet sonore)'을 재료로 그 소리를 조작하고 조합해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악기법을 말한다. 셰페르는 창작과정에서 작곡가와 청중의 소통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녹음된 소리를 역순으로 재생시키거나 테이프를 짧게 자르거나 확대시키며, 에코효과를 집어넣거나 음높이와 강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전자음악과 컴퓨터음악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948년 셰페르에 이어 1952년에 불레즈나 메시앙이 구체음악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 뒤를 이어 바레이즈, 슈톡하우젠, 라마티, 크세나키스, 페라리 등도 이 방식으로 작곡한다. 전자음과 소년의 노랫소리를 소재로 한 1956년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인 '소년의 노래'가 성공함으로써 이런 장르의 음악도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관련전시] 백남준아트센터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전(1층)' 2013년 6월 30일까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열린다.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휴관) 관람료 성인 4,000원 '끈질긴 후렴(2층)' 기획전도 같은 곳 2층에서 6월 16일까지 열린다.

<백남준의 귀환(백남준아트센터총체미디어연구소 편저)> <굿모닝 미스터 백(김홍희 저)> 등 참고



태그:#백남준, #슈톡하우젠, #존 케이지, #신음악(NEUE MUSIK), #행위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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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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