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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출발한 탓인지 가막만과 여자만을 가로막은 여천반도의 끝자락에 이르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직도 면사무소를 비롯해 관공서가 문을 열기엔 이른 시간이다. 남해수산연구소 모퉁이를 돌자 얼마 전 개통한 백야대교의 모습이 드러났다. 섬사람에게 다리는 '숙원사업'이다.

섬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먹고 살만한 땅을 갖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육지로 향하는 일이다. 이마저 어려우면 못 입고 못 먹어도 어떡하든 자식들을 도시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돈을 벌면 여수에, 목포에, 군산에 자식들 교육용 집을 마련하려고 한다. 육지 것과 같아지려는 심성, 즉 섬성(islands identity)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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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1만2천여 명에 달했던 백야도의 인구는 지금 4천여 명에 불과하지만 화정면의 중심지이다. 화정면은 유인도 15개, 무인도 56개 등 71개의 섬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백야도와 화양면의 연결은 여수-고흥간 섬과 섬을 11개의 다리로 연결하는 '환상'의 연륙·연도 사업의 시작인 셈이다.

▲ 백야도 모습
ⓒ 김준
▲ 여수와 고흥의 연륙연도교 계획도, 백야대교를 시작으로 11개의 다리를 연결한 계획이다.
환상(?)의 연륙연도사업 시작인가?

서남해안에는 뭍에 있는 사람이 보일 정도로 지척인 섬들이 많이 있다. 여수의 백야도 그 대표적인 섬이다. 불과 3분 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에 선거철이면 정치꾼들은 '다리공약'으로 섬사람들을 표심을 자극했다. 해방 후 최근까지 그랬다. 늘 이번엔 틀림없다며 공사착공 약속까지 해댔다. 백야대교는 지난 2000년 6월 착공하였다지만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공사기간은 50여 년 되는 셈이다.

백야대교는 370여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폭 12m 연장 325m로 최대 경간장(徑間長) 183m에 이르는 닐센아치형으로 건설됐다. 특히 이 다리를 주목하는 것은 백야대교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화정대교, 제도대교, 개도대교, 월호대교, 화태대교, 조발대교, 둔병대교, 낭도대교, 적금대교, 팔영대교 등 11개 교량이 완공돼 여수반도와 고흥반도가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라남도와 여수시는 섬과 섬을 아름답고 다양한 다리로 연결해 다리박물관을 모색하고, 바다와 섬을 환상적인 관광지로 만들 야심찬(?) 계획을 마련 해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웰빙시대에 초점을 맞춰 섬들을 생태 및 문화, 명상 등 테마별로 개발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체류형 관광지로 만든다는 것이다. 백야도에서 여수 즉 가막만을 가로지는 연도와 고흥으로 이어지는 여자만을 연결하는 것이다. 여수 돌산읍과 화태도간의 460m공사는 서해대교와 같은 사장교로 공사 중이다.

여수시에서는 연륙, 연도교지구 관광개발사업을 내놓았다. 그 중 백야도에는 유스호스텔, 천문대 등 청소년 학습체험장을 만들 계획이며, 개도는 생태휴양림과 자연사박물관, 화태도는 어촌체험마을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민간투자자가 있어야 하고 정부의 지원이 가능해야 할 일이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것은 그 동안 개발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를 너무 많이 보아온 탓이다. 늘 개발이 있는 곳의 주민들은 몇 푼의 보상금과 생활터전을 바꿔야했고 그곳엔 대규모 자본들이 들어와 순식간에 환경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민들은 생업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지속가능한 개발'은 없다고 단언한다.

▲ 다리가 완공되면서 국도 77호선의 백야도까지 연장되었다.
ⓒ 김준
해변산중, 무엇으로 살아야하는가

주민들은 스스로 백야도를 '해변산중'이라고 부른다. 그 만큼 바다일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여수 인근의 어촌마을처럼 굴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기잡이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몽돌밭 해볕 앞에 일부 양식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시원찮다. 고기잡이배들도 주변에서 작은 통발을 할 정도의 목선들이 대부분이다. 멸치 낭장 서너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중에 밭을 일구어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앞 공동어장에서 물때에 맞춰 바지락을 캐서 용돈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현금 소득원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농사는 몽돌해변과 화백리 주변, 그리고 백야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다랑이 논들이 전부다. 그리고 큰산과 작은산 일대 개간할 수 있는 곳이면 모두 개간해 밭작물을 심고 있다. 그런 탓에 섬치고 경지면적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백야대교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임홍섭(77· 백야리) 어르신의 30여 년 전 백야도 일대의 바다 이야기이다.

"지금도 멸치, 징어리(정어리)도 나오지만, 면에서 일 허던 때(1960년대 후반) 징어리가 가세 밀릴 정도였으니까. 가세 밀리면 바구리로 줍고 그랬는디. 조기, 감성어 별것 다 났어요. (지금은) 그런거 저런거 다 없어져 부렀어. 여기를 해변산중이라고. 여그서는 '조금간다'고 그물로 좀 잡아가지고 오는 것 말고는 없어. 물때 맞춰가지고 배에서 밥도 해먹고 조를 짜가지고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을 '조금간다'고 혀. 여기가 큰 어장터는 못 되여."

면사무소에서 만난 총무계장은 "대한민국에서 면소재지 치고 식당 없고, 여관 없는 데는 우리면 밖에 없을 것"이라고 열악한 환경에 대해 성토한다. 면사무소 직원들마저도 인근 주민의 집에 식사를 부탁해 대신하고 있다. 그는 다리가 놓이면 횟집, 주유소, 모텔을 비롯한 숙박시설이 지어지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바다와 접한 목이 좋은 곳은 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 평당 5만원에 거래되던 땅들은 현재 20만원을 훌쩍 넘어 25만원까지 거래되고 있다.

백야도를 건너 등대로 가는 길에 만난 촌로는 외부 차들이 들어오자 신기한 듯 나무를 진 지게를 바치고 "섬이라 귀경할 데가 없어요. 몽돌밭 가봤어요"라고 한마디 건넨다.

▲ 돌담을 쌓아 바람을 막고 농사를 짓는 섬지역의 독특한 생업모습이다.
ⓒ 김준
▲ 백호산 허리까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있는 백야도 사람들.
ⓒ 김준
백야도의 볼거리로는 몽돌밭 해변과 백야등대, 그리고 백호산 등산로 등이 있다. 차를 도로에 세워두고 10여 분을 걸어가면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파도소리를 찾아 가면 갑자기 몇 백 평의 논이 가로 막아선다. 이곳에선 바람막이 돌담을 둘러치고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 이런 모습에서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농사를 짓는 섬 지역의 특징을 엿 볼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권하는 백야도의 최고의 볼거리이다. 그곳을 지나면 바로 몽돌밭 해변이다. 수심이 깊어 조심스럽지만 연인들이 조용하게 즐기기에는 좋을 듯하다.

여수엔 1905년 4월에 불을 밝히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거문도 등대를 비롯해, 1910년 시설된 소라도, 1928년 백야도 등의 등대가 있다. 해양수산부는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등대의 해양유물로서 보존가치, 관광자원화 가능성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등대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한 문화재등록도 검토하고 있다.

백야등대 밑 암초해안은 최고의 낚시 포인트로 각광받고 있다. 평일인데도 백야도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도로에는 50여대의 차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백호산 등산로는 이정표와 함께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정상에서 바라본 다도해 모습은 절경이 훌륭했다.

▲ 백야도 몽돌해변
ⓒ 김준
▲ 1928년 불을 밝힌 백야등대
ⓒ 김준
백야리 앞 갯가에서 만난 배선엽(82) 할머니는 지난 15일에 모아둔 바지락을 서울에 있는 딸에게 보내기 위해 갯가에서 씻고 있었다.

"딸이 서울에 사는데 마을쫑지 조차 반찬조차 보내려고. 한시 캔 것이여. 여그는 상고(장사)가 계약을 해놓고, 아무날 캐주라 그러면 파주고. 먹을 것은 저쪽에서 캐야제. 한시(보름)에 사흘정도 작업허제. 동민들이 전부 나와 캔대로 가지고가. 상고가 전표 끊어주면 이장이 배당을 해주제. 음력 2월부터 6월까지만 해. 그 뒤로는 개를 막아 부러 하들 못하제. 옛날에는 바지락 해서 돈도 많이 하고, 저 앞에 어랑도(개야리 앞 작은 섬)에서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요."

마을 앞 갯벌은 마을공동어장이다. 마을에 주민들이 많이 살고 갯가에서 바지락, 가사리, 톳 등이 많이 날 때는 바닥을 10개(10개 반)로 나누어 채취했었다. 지금은 마을과 어랑도 사이의 갯벌에서 바지락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반을 구분하여 채취하는 것 대신에 날을 정해 모두 같은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도 '상고'(장사) 요청이 있을 때 가구당 한 사람씩 나와서 작업을 하고 있다.

바지락 작업은 음력 2월부터 6월까지 여덟 물에서 열물까지 이루어지는데 젊고 바지락을 잘 파는 사람은 보름에 20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배씨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5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외지에 나간 가족들이 와도 대신 바지락을 캘 수는 없다. 반드시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한 사람에게만 개(갯가)를 여는 것이다. 바지락이 많이 나오고 돈이 될 때는 관리인까지 두었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대로 외부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

▲ 서울 딸에게 줄 바지락을 씻고 있는 백야리 배선엽할머니.
ⓒ 김준
섬마을 우체부 백야도에 모이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화정면 선착장의 아침 풍경은 다른 포구와 다르다. 어촌이지만 고기잡이 배들은 거의 없고 작은 목선들만 눈에 띈다. 섬 주변에서 통발이나 주낙으로 반찬거리 정도 준비하는 배들이다. 관공서가 문을 열 때쯤이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 배들이 하나 둘 포구로 모인다. 이들 배에는 어김없이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타 있다. 개도, 상하도, 낭도 등 인근 섬에서 일을 보러 소재지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배를 운전하고 오는 사람은 한결같이 우체부 가방을 매고 있다. 이들은 면소재지 우체국에서 섬에 온 우편을 받아 가지고 들어가는 마을아저씨들이다. 민간인 우체부인 것이다. 이들은 우편물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소식도 전하며, 농사철에는 비료, 농약, 면사무소 서류전달도 한다. 그리고 섬에서 가지고 온 갖가지의 택배(대부분 자식들에게 섬 마늘, 산나물, 된장, 고추장, 각종 수산물 등)도 전달한다.

지방민의 숙원사업으로 다리가 완공되면서 평일에도 외지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특히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낚시도 즐기고 음식도 해먹고 있다. 하지만 화장실, 식수대 등 외지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전혀 없다. 이곳에서 즐기다 가는 사람들이 남기는 것은 쓰레기뿐이다.

▲ 백야대교가 만들어지면서 포구까지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 김준
다리가 놓이면서 500원이면 건너던 도선은 끊겼으며 지척에 두고 병원을 가지 못하는 일은 사라졌다. 시내버스도 들어오고 아무 때나 택시를 타고 바로 들어 올 수 있다. 주민들의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외지에 있는 자식들은 이제 고향에 있는 부모들을 걱정해야 할 것 같다. 무시로 드나드는 자동차로 생전 걱정 없던 '차조심'을 해야 할 모양이니. 꼭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리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백야도 소득원 개발인 것 같다. 임홍섭 어르신은 '소득원'개발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다리처럼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노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것이 임씨가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주민들 대부분이 고령인 탓에 지역발전에 대한 적극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느 섬이 그렇듯 다리가 놓이면 외지자본들이 섬을 뒤집어 놓듯 백야도도 외지인의 장사수단으로만 전락할 수도 있다. 확실한 관광자원과 소득원 없는 백야도가 연륙되면서 어떻게 변할지 주목된다. 연륙 이후 지방정부와 주민들의 더욱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예향 전남소식'에 게재된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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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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