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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수리에서 본 차귀도 모습
ⓒ 김준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와 용당리에서 본 차귀도는 상여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차귀도와 바다를 앞마당처럼 두고 살아온 두 마을은 대가 끊어질까 우려하여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도서지역의 혼인은 섬 안에서 마을간 많이 이루어졌으며 멀리 간다고 해야 이웃 섬마을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이야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니 혼인도 전국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제주는 공간적인 거리야 바다 건너 섬이지만 시간적인 거리는 훨씬 가깝다. 그렇지만 인간들은(특히 육지) 늘 시간과 공간의 거리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용수리 포구의 좌우 방사탑을 사이에 두고 여인네가 아이를 배에 올려놓고 누워 있는 형상을 한 섬이 있다. 차귀도 앞에 있는 이 섬은 '누운섬'(臥島)이다. 사실 '와도'는 섬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다. 화산도이건 대륙도이건 바다에 섬들이 누워 있는 형상이지 서 있는 모습을 한 섬이 얼마나 되겠는가. 전라도 영광에도 '누운섬'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누운섬을 '눈섬'으로 부르면서 '설도'(雪島)가 되어버렸다.

▲ 용수리 방사탑 뒤로 왼쪽이 와도, 오른쪽 멀리 작은 섬이 차귀도의 매바위이다.
ⓒ 김준
차귀도는 인근 바다가 사나워 조난사고가 많아 시체가 곧잘 이곳 포구로 들어와 주민들이 이곳에 액을 막기 위해 방사탑을 쌓았다고 한다. 차귀도와 관련된 설화 중에도 이곳 바다가 사나워 중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침몰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래도 설화가 모두 허구만은 아닌 것 같다.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서 보아 가장 큰 섬인 대섬(竹島)을 비롯해 북쪽에 와도, 남동쪽에 썩은섬 및 지실이도 등을 모두 일컬어 차귀도라고 한다. 차귀도를 포함해 고산리 일대는 1970년대 김기영 감독이 만든 영화 '이어도'의 주무대였다.

▲ 자구내 포구와 차귀도 일대는 1970년대 영화 '이어도'의 촬영장소였다.
ⓒ 김준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낸 섬, 차귀도

제주도는 바다와 산, 사람과 동물(말과 소) 어디에나 '돌'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수많은 신화와 전설에도 '돌'은 꼭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영실의 오백장군과 차귀도의 장군석 이야기일 것이다. 현용준 선생님이 채록한 자료 <제주도전설>(서문당)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옛날에 설문대 할망이 아들 오백형제를 거느리고 살았다. 어느 해 몹시 흉년이 들었다. 하루는 먹을 것이 없어서 오백형제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죽 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아들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돌아오자마자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정말 죽 맛이 좋았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온 막내 동생이 죽을 먹으려고 솥을 젓다가 큰 뼈다귀를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빠져 죽은 것을 알게 됐다. 막내는 어머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어머니 죽을 먹어치운 형제들과는 함께 못살겠다면서 애타게 어머니를 부르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으로 달려가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여기저기 늘어서서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그리며 한없이 통탄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 이것이 오백장군이다."


▲ 설문할망의 오백장군 중 막내 장군바위
ⓒ 김준
설문대 할망이 삽으로 일곱 번 흙을 파서 던진 것이 한라산이요, 그 300여 개의 오름이 그녀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이라니 할망의 크기를 상상할 수 없다. 서해 바다의 어민들의 안전한 고기잡이와 풍어를 관장하는 개양할미도 어찌나 크던지 서해바다 어딜 들어가도 발목을 넘지 못하고 깊어야 무릎아래라고 한다. 전설과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니는 특징들이다.

차귀도의 형성과 관련된 전설은 따로 있다. 비양도도 그렇지만 제주도도 섬의 형성만 아니라 다양한 신화와 전설에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 중국의 풍수달인 '고종달'이 제주 인맥을 끊고 귀국하는 것을 막았다는 제주 한라의 영신 '매바위'
ⓒ 김준
중국 송나라에서는 제주도는 장수가 날 지세라 하여 지맥을 자르기 위해 '고종달'이라는 사람을 보냈다. 그는 제주 지리서를 가지고 서쪽으로 가면서 지맥을 끊었고, 남제주군 안덕면의 산방산의 부근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용의 형상으로 지리서에 왕과 장수가 날 곳이라 하여 그는 그 용 형상의 잔등을 끊게 되었고 잔등에서 피가 나와 주변을 물들였다.

그렇게 제주도 인물 맥을 끊은 '고종달'을 태운 배가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차귀도 앞을 지나자 어디선가 날쌘 매가 한 마리 다가와 배를 침몰시켰다. 한라산 산신의 노여움을 받아 태풍을 만나 죽게 된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그 신령을 모신 곳이 차귀도였다. 그리고 '고종달'이 제주도 지맥을 끊고 중국으로 돌아가는(遮) 길을 차단(歸)했다고 해서 차귀도(遮歸島)라고 했다고 한다.

차귀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다.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산리 주민들에 의하면 1980년대 중반까지 일곱 가구가 보리, 감자, 콩, 수박, 참외 등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국가에서 차귀도 사람들을 뭍(제주 본섬)으로 이주시키려고 했었다.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 침투 이후 섬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디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리고 올 수 있겠는가. 아마도 1980년대까지 차귀도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결국 국가에서 뭍(본섬)에 거처를 마련해준다는 조건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 차귀도에 남아 있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
ⓒ 김준
▲ 1950년대 불을 밝힌 차귀도 등대
ⓒ 김준
고려 말 몽고와 왜구가 우리나라 섬과 바다를 자주 침입해오자, 고려정부는 그 대비책으로 '해도입보론(海島入保論)'과 '해도개발론(海島開發論)'을 내놓았다. 이는 적이 침입해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군사와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섬을 방비하도록 하여 섬을 개발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진도, 장산도, 압해도, 흑산도 등 서남해에 설치된 치소를 모두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강제로 육지로 내보냈다. 이를 '공도정책(空島政策)'이라 부른다. 섬을 비우는 정책이다.

지금부터 600여 년 전에도 그랬다. 그로부터 다시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라고 한다. 그래서 도서지역의 족보를 통해 입도조(처음으로 섬에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해 보면 오래된 성씨라고 해야 양란 이후 들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그 사이에 섬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리들이 모두 빠져 나간 섬이야 말로 민초들에게는 지상낙원이요 천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몰래 몰래 섬으로 들어가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었을 것이다. 차귀도의 현대판 공도정책을 보면서 자꾸 공도정책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15세기 기록에는 '정의현 동쪽 우도와 대정현 서쪽 차귀도에 옛날부터 왜선이 은박함'이라는 기록이 있다. 일찍부터 차귀도는 중앙정부의 기록에 오르내렸다.

▲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1702년(숙종28) 11월 13일 실시한 차귀진의 조련과 점검도이다. 차귀진의 모습만이 아니라 당산봉수(烽燧), 우두연대(煙臺)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 김준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변방에서 중앙역사의 전복을 꿈꾸는 이영권 선생님은 그가 쓴 <제주역사기행> 서문에서 '삼별초의 영웅적인 항쟁도 제주사람들에게는 재앙이고, 고려도 몽골도 모두 똑같은 외세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앙의 기록으로 제주사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의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육지의 눈으로 바다와 섬을 보지 말고 바다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다. 늘 육지에서는 섬을 관리 혹은 개발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혹자들은 제주 백성들이 서울의 관리보다 바다에서 자주 만나는 일본사람과 친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내놓는다. 늘 북쪽만 바라보면 다시 왕이 불러주길 바라며 수탈만 일삼는 관리보다 바다에서 만나는 일본의 어민(왜구일수도 있다)들과 더 가까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민족과 국가는 근대 역사가 만들어낸 굴레일 뿐이다. 이영권 선생이 그래서 '그들에게 민족은 없다'고 했던 모양이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http://jejuhistory.com/ 참조).

괴기 낚으래 가게마씸

오징어를 말리고 있는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서 차귀도까지 10분 거리이다. 차귀도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오징어는 아니지만 제주도 해풍에 말린 오징어 맛이 울릉도 오징어 못지않다.

제주도가 다 그렇지만 차귀도는 여행객에게 최고의 낚시터이다. 낚시도구를 챙겨오지 않아도 고산리에서 배를 타면 배 주인이 낚시까지 제공해준다. 그렇다고 모양새만 강태공인 것이 아니다. 새우를 바늘에 끼우고 차귀도 앞 뒤 어디에나 넣기만 하면 바로 손맛을 볼 수 있다. 자리돔, 우럭, 놀래미, 얼랭이, 꼬들치 등 한 두어 시간에 10여 수는 금방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잡아 낼 수 없다. 그 정도에 그쳐야 한다. 모두 잡아내면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잡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정도에 이르면 배주인은 포구로 향한다. 작은 고기는 다시 바다로 보내고 먹을 만한 것은 가져올 수 있다.

죽도에는 1957년 12월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 무인등대가 있다. 차귀도 등대는 어둠을 감지하고 자동적으로 불을 밝힌다. 사람의 손을 덜 타서인지 이곳에는 귀한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제주도에서 아열대성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5~10m 수심에는 아조대 미세홍조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섬과 인근 바다에 한국 미 기록 종들이 다수 발견돼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곳곳에 집터자리와 말방아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물론 농사를 지었을 법한 구릉지에는 흔적들도 있다.

▲ 오징어를 건조하고 있는 자구내 포구
ⓒ 김준
▲ 차귀도 해역에서 이루어지는 선상낚시 체험
ⓒ 김준
해양수산부에서는 1998년 통영과 여수에 이어 2004년 울진, 태안, 북제주군 차귀도 인근 해역에 바다목장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차귀도 주변해역에 국비 350억을 포함해 총 570여 억을 투자해 제주형 바다목장을 조성하고 체험형 관광지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 그곳에는 강태공들이 많이 찾고 있다. 그만큼 고기가 많고 목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늘 바다와 섬을 다니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있는 것을 잘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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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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