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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졌을까? 아니 어떻게 해서 학자들이 보게 되었는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사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이미 바위에 고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을 테니까.

늘 학자들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 것들을 뒤늦게 확인하고 '최초'로 '발견'했다고 야단이다. 물론 학문적 조사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말은 모르지만 최초의 발견은 아니지 않는가.

1970년 겨울, 동국대 불교사적 조사팀의 조사활동 중 그곳에 사는 아이의 "물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반구대 암각화는 세상에 알려졌다.

국보급 자원의 발견치곤 참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국보급 자원이 확인된 이후 무려 30여 년 동안 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도록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없다. 외국에 학자들은 대곡리 암각화를 보고서 당장 댐을 트고 하루빨리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한다.

▲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 지류, 쌓인 토사로 협곡의 모습을 잃고 있다.
ⓒ 김준
대곡리 암각화는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이며, 울산만에서 태화강으로 거슬러 서북쪽 약 26km 지점인 대곡천 기슭에 자리해 있다. 2km의 협곡을 굽이쳐 내려온 대곡천이 반구대(盤龜臺)을 감고 돌아 협곡의 능선이 급히 멈추면서 병풍을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다. 암각화가 그려진 곳 암벽은 이들 바위 중 앞으로 약간 숙여져 있어 바람과 비의 피해를 덜 받는 바위이다.

1968년 사연댐의 조성으로 일대가 침수되고 퇴적물이 십여 미터 이상 쌓여 있어 본래의 강의 모습은 잃어버렸다. 태화강은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를 향해 흐르다가 중류에서 대곡천과 만나고, 하구에 이르러 동천강과 합하여 울산만으로 빠져나간다.

고래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

대곡천과 만나는 태화강 중하류지역은 고지형으로 보다 유량이 많고 충적지가 넓으며, 먹을 것이 풍부한 해안도 가까워 선사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태화강 유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청동기문화로 울산 전체 청동기 문화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곡리의 암각화를 그린 주인공들도 이르게는 신석기, 늦게는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대곡리 암벽화 전체 모습(장명수 논문 그림에서 촬영, 왼쪽은 동해바다를, 오른쪽은 산을 향하고 있다)
ⓒ 김준
대곡리 암각화는 강바닥 보다 높은 암벽(10*3m)에 290여 점의 바다와 육상 동물, 인간의 생활상 등이 면과 선을 이용해 새겨져 있다. 바다와 관련된 해양성 그림으로 고래, 거북, 물개, 어류, 배, 노, 작살, 사람 등이, 육지와 관련된 내륙성 그림으로 사슴, 호랑이, 돼지, 소, 족제비, 개, 토끼, 새, 그물, 울타리, 탈, 사람 등이 배치되어 있다.

해양성 그림은 암벽 왼쪽 즉 동해바다를 향해 90여 점이 그려져 있는데 이중 면새김이 68점, 선새김이 21점이며, 구체적으로 고래가 49점(면새김이 43점, 선새김이 6점)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내륙성 그림은 암벽 오른쪽 내륙을 향해 120여 점 그려져 있는데 이중 면새김이 55점, 선새김이 68점이며, 이 들 중 사슴이 49점으로(면새김 38점, 선새김 11점) 가장 많다.

대곡리 암각화인들의 생업과 신앙을 연구한 장명수는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지각변동이 있기 이전에 일대가 바다였던 점, 그림의 구성이 면새김 위에 선새김이 이루어진 점 등을 토대로 면새김이 먼저 이루어졌고, 나중에 선새김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면새김은 주로 고래무리가 중심이고, 선새김은 사슴무리가 중심인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의 배치도 해양성 동물은 동해바다를 향해 암벽 왼쪽에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내륙성 동물은 오른쪽에 그려져 있고 머리도 대부분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 맨 위에 주술사를 향한 고래들의 모습, 작살에 찔린 고래의 뒤트는 모습이 사실적이다.
ⓒ 김준

▲ 육지의 짐승들이 새겨진 암벽
ⓒ 김준
태화강 상류는 5천 년 전에는 바다였다. 대곡리 암각화를 통해서 동해를 회유하던 고래가 내만 깊숙한 곳에 먹이를 찾아 들어오면 작살을 가지고 가서 잡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으로 최초의 포경기록인 것이다.

특히 동해 지역은 우리나라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미역산지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먹는 것을 보고 인간은 출산 후 산후 조리로 미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미역이 많고 내만 깊숙하게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태화강 중상류는 최적에 '고래조산소'였을 것이다.

▲ 먹이를 노리는 역동적인 호랑이 모습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고래를 잡는 모습
ⓒ 김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에서 고래를 잡았던 서구인들은 물 반 고래 반이라고 칭할 정도로 고래 천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사시대에도 만 깊숙히 들어온 고래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뭍에 올라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래를 발견하고 암각화인들은 식용가능성을 확인했을 것이다.

암각화는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그려진 것은 아니다. 지각변화, 그리고 토사에 의해 바다가 육지로 변하기 시작하자 암각화를 그렸던 사람들은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하면서 바위그림에 사냥모습과 가축이 추가되었다.

그림 기법과 암벽에 공간배치도 먼저 해양성 동물을 중심으로 면새김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 내륙성 동물들이 선새김으로 더해졌다. 선새김이 암벽 오른쪽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지만 여백들 사이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도 먼저 면새김을 하고 난 이후 육지 동물사냥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서 추가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돼지 등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후반기에는 직접 가축을 기르기도 하고, 호랑이나 표범 등 맹수로부터 이를 보호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 긴뿔의 사슴과 긴꼬리의 족제비, 멧돼지를 향해 활을 쏘는 벌거벗은 남자는 남근을 곧추세우고 있다.
ⓒ 김준

▲ 사슴을 사냥하는 사냥꾼
ⓒ 김준
자연신을 섬겼던 사람들

암벽화에는 이러한 생업활동만 아니라 당신 인간들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는 의식들도 그려져 있다. 태양신을 섬기던 당시 해가 뜨는 동쪽 바다에서 들어오는 고래는 좀 과장한다면 '해를 물고 오는 신성한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고래 무리가 그려져 있는 암벽 왼쪽 상단부에는 벌거벗고 남근을 곧추세운 남자가 허리를 반쯤 굽히고 두 손을 머리까지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무리의 고래들이 그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역시 여자로 추정되는 벌거벗은 사람이 사지를 벌리고 고래를 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래를 호위하는 거북과 바다새, 나팔을 불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 고래를 많이 잡게 해주고, 잡은 고래가 다시 재생하길 기원하는 주술사 모습
ⓒ 김준
장씨를 이를 상단의 남근을 곧추세운 남자를 주술사로, 하단의 사지를 벌린 여자를 주술사의 생식주술에 상대자로 바다 생물의 생육과 어로의 풍우를 주관하는 해신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거북과 바다새는 길을 여는 매개자 안내자며 나팔을 든 남자는 고래와 유사한 소리로 고래를 유인하거나 탐색하는 지휘자로 해석하고 있다. 남근을 드러내고 상대자의 반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생식신앙, 신에게 고래떼를 보내주기를 기원하는 모습, 죽은 짐승(고래)의 재생을 기원하는 신앙적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내륙성 동물의 무리 그림 중에도 '교미하는 사슴', '암사슴과 새끼 사슴', 남근을 내놓고 사냥하는 '사냥꾼'과 '멧돼지'의 대결 등을 통해서 신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주술사(남자)는 바다신과 산신 등 자연신(여신)에게 수렵한 동물들의 재생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주술사가 남근을 곧추세우고 뭇 생물들의 생육들 담당하는 자연신(여신)들을 자극하여 풍성한 사냥감을 제공받으려는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암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고래와 사슴이다. 인간은 고래를 잡기도 하지만, 고대 신화에 의하면 신격인 고래에게 사슴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도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고래와 사슴은 신격과 제물의 관계로 그 사이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 고래를 잡아야 하는 선사인들에게 사슴은 자연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인 것이다. 암벽화 중에는 사슴과 고래가 겹쳐있는 그림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암벽화 새겨진 인간의 얼굴
ⓒ 김준
사람이 변해야 바다가 살고, 바다가 살아야 고래가 온다

일찍이 수산업사를 연구한 박구병 선생은 반구대에 등장하는 고래를 흑고래, 긴수염고래, 귀신고래, 향고래, 솔피고래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흑고래는 과거 동해에 풍부했던 고래이며, 귀신고래는 한국에서 발견되는 고래라고 밝히고 있다.

1899년 일본이 한 포경선이 항해일지는 이를 입증하듯 '1월 13일 강원도 영일만에 갔더니 백 두의 귀신고래떼가 들어와 있었다. 1월 18일 영일만 동북동 20마일 수역에는 참고래떼가 득실댔으며, 20-40마일 수역이 모두 고래뿐이었다. 배가 빨리 항해할 땐 고래 등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가 배를 향해 오기도 하였다. 그 수를 따지면 몇 천두에 달해 쉽게 숫자를 알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대곡리 암각화는 울산지역 일대에서 발견된 암각화 중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우리나라 암각화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새겨진 그림이 매우 다양하며 당시 인간 생업 활동의 지혜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제는 아직도 그림의 문화사적 해석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 울산공단 이정표와 함께 있는 세계포경위원회 회의 홍보판이 이채롭다
ⓒ 김준
울산시는 세계포경위원회(IWC) 회의를 유치하고, 고래를 이용해 생태도시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공업도시 울산을 생태도시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해 바다에 고래가 빈번하게 출몰하여, 관경(觀鯨)투어가 이루어지길 기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울산시도 인근의 포항시도 고래만 기다릴 뿐, 1962년 정부가 울산의 쇠고래 회유해면을 천연기념물 제126호 지정한 이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심찮게 뉴스거리로 밍크고래가 그물에 걸려 몇 천만 원에 팔렸다는 소식만 들리고 있다.

그래서 고래는 어민들에게 바다의 '로또'로 통한다. 고래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혼획을 가장한 불법포획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사실 어느 누구보다 동해에 고래가 나타나길 기원하는 것들은 암벽에 새겨진 고래들일 것이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바위에서 뛰쳐나와 사연댐을 부스고 태화강을 지나 울산만으로 동해로 나가고 싶을 것이다. 불법으로 포획되는 고래 못지않게 해양오염으로 인해 죽어가는 고래도 적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이 변해야 바다가 살고 바다가 살아야 고래가 온다

덧붙이는 글 | 현지답사 후 장명수(울산 대곡리 암각화인들의생업과 신앙, 1997), 박구병(한반도연해의 포경자원에 대한 사적 연구, 1995)의 연구성과를 검토한 후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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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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