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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해송, 곰솔하면 곧잘 태안반도를 떠 올린다. 분명 태안반도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사구가 형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의 종류는 강송, 곰솔, 반송, 백송, 리기다 등이 있다. 강송은 줄기가 붉다고 하여 일본 사람들이 '적송'이라 부르며, 곰솔도 마찬가지로 '흑송'이라고 부른다. 흔히 해송으로 알려진 곰솔은 바다가 강한 염분에 잘 견디며, 잎은 두 잎씩 붙어나는데 힘이 좋아 찌르면 아플 정도라고 한다.

▲ 관매도는 배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면 관매리, 오른쪽으로 가면 관호리이다. 곰솔 마을숲은 오른쪽 관매리 관매해수욕장과 함께 있다.
ⓒ 김준

▲ 안개로 덮인 관매마을
ⓒ 김준
해안가 마을 앞에 만들어진 곰솔은 섬이나 바닷가에 사람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면서 바람과 모래를 막기 위해서 심어놓은 경우가 많다. 농촌에서도 마을의 뒤와 양쪽에 산이 있고 옴팡진 곳에 마을이 자리하면 마을 입구가 뚫려 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들 숲이 자라면서 마을 숲을 형성해 방풍림, 방사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마을 숲의 풍수적으로 수구막이라고 하여 해와 살을 막고(防害, 防煞), 바위나 산이 바로 마을에 기운을 미치는 것을 막는(防岩, 防山)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실 섬에서 돌과 나무로 만들어 담장처럼 쌓아 올린 '우실'이라고 불리는 린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만들어졌다. 예로부터 우실은 '바람과 모래를 막고', '마을 경계를 표시하고', '풍수지리적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관매도(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의 경우 풍수지리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바람과 모래를 막고 마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해송 주변에 모래사구 발달하면서 해수욕장으로 개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민가와 외지 관광객의 생활공간을 구분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그 동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곳이 없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철조망으로 막힌 '군사지역'이나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는 '섬'은 마지막 남은 우리나라 생태계의 보고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남북관계 개선을 타고 불행하게 이들 지역들이 개발되고,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외딴 섬과 바다를 사람들이 찾게 되면서 그 보고도 무너지고 있다.

▲ '곰솔숲', 4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관매도 마을숲
ⓒ 김준

▲ 관매도 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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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적으로 해풍 막아 키운 곰솔들

자연스럽게 형성된 숲과 달리 사람이 특별한 목적에 따라 조성한 숲은 제사나 굿을 위한 의례의 장소, 아이들에게는 놀이의 장소요 어른들에게는 여름철 휴식의 공간이었다. 지역에 때로는 양반이나 유생, 혹은 사족들이 시를 짓고 여흥을 위해 숲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을 숲은 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곰솔로 이루어진 관매도의 마을 숲은 바다와 마을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족보에서 확인된 관매도에 가장 오래된 입도조는 강릉 함씨로 17세기말에 나주에서 들어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 성씨의 족보로 13대까지 확인되는 것으로 곰솔 숲의 형성 시기를 관매도 입도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대략 400여 년에 이를 것으로 볼 수 있다. 곰솔 숲은 대략 4만여 평에 달해 정확하게 소나무의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수 만 그루는 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곰솔 숲과 마을 사이에는 관매도에서 가장 좋은 논과 밭이 있다. 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곰솔 숲으로 인해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쌓이면서 자연적으로 늪지가 만들어지고 개간하여 논과 밭이 된 것이다. 지금은 논농사를 거의 짓지 않고 마을, 파, 쑥 등이 자라고 있으며 일부는 미역건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곰솔 숲이 오늘처럼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촌로들은 조상들로부터 '뿌리를 내리지 못해 바람에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수대로 발을 엮고, 거적으로 바람을 막아 나무를 키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곰솔이 아름드리로 자라고 나서는 모래가 유실되고 뿌리가 드러나자 복토를 하고 뿌리에 띠를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모두 마을 주민들이 함께 나서야 했다.

곰솔 숲은 해풍에 만들어진 사구지대에 조성되어 있다. 모래언덕이 자연스럽게 마을과 바다 사이에 언덕을 만들고 그곳에 소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관매도에 처음 입도해 정착한 선조들은 식수, 뱃길, 토지 등을 고려해 정착하는 곳이 해풍이 바로 치는 곳으로 바람과 모래가 늘 문제였던 모양이다. 곰솔 숲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땔감이 그렇게 귀하던 시절에도 마을에서는 곰솔 숲에 쌓여 있는 솔잎을 함부로 긁지 못하게 했다.

이런 곰솔 숲이 업자에 의해서 모두 사라질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지금부터 40여 년 곰솔 숲을 진도의 경찰 조아무개씨가 매입을 해 목재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미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가 끝난 상태로 베어내기 직전이었다. 현 마을이장 이생기(68)씨는 당시 군에서 제대하고 마을에 귀향해 이 같은 소식을 듣고 당시 마을청년들과 함께 '곰솔숲' 사라지면 바람과 모래 때문에 '밥' 해먹기도 어렵고 사람들이 여기서 살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해 막아냈다고 한다.

▲ 마을 입구에 몇 개의 우물들이 섬지역이 식수문제를 짐작케 한다.
ⓒ 김준
인공습지 만들고 자연습지 메웠다

관매도 곰솔 숲처럼 해풍을 막고 마을을 보호해주는 마을 숲은 해안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남해 물건리 방조림이 대표적인데 이들 마을 숲은 식수가 귀한 섬 지역에 식수를 마련해주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해의 방조림은 끔찍한 피해를 주었던 지난해 태풍 '매미'로부터 마을을 지켜내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손을 덜 탄 탓에 마을 숲은 당 숲과 함께 토착생물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 띠는 빗물을 비롯해 숲에서 바다로 흐르는 물이 양과 속도를 감소시켜 토양 수분을 유지시키고 자연스레 사구지역 습지를 만들기도 한다. 관매도 곰솔 숲 안에는 제법 큰 자연 습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곰솔 숲 안에 자리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분교 운동장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이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운동장으로 이용하면서 메우고 펌프 샘으로 바꾸었지만. 바로 학교 담장 밑에는 1960년대 말 한해로 식수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에 주민들이 함께 팠던 우물이 있다. 지금도 덮개로 막아져 있지만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 일대가 자연습지 지역으로 사구지역에 많은 식물들이 서식했을 것이고, 난대림 지역의 습지식물들이 서식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곰솔숲과 해안을 경계로 쌓은 제방
ⓒ 김준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뒤쪽에 수원지를 조성하면서 나온 돌과 흙을 가져다 이곳 습지를 메웠다. 인공습지를 만들기 위해 자연습지를 메운 셈이다. 지금은 풍난자생지 복원팀에 의해서 숲속에 작은 쉼터로 조성되고 있다.

순천향대 신현철 교수는 곰솔에 이어 후계목 조성과 관매도 토종 식물들을 심어서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진도의 풍란보존과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조정일씨는 장기적으로는 습지를 복원하는 일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관매도 해수욕장과 인접해 있는 곰솔 숲은 콘크리트로 해안제방을 쌓은 통에 모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물 빠짐에도 장애를 주고 있다. 지금도 해안제방에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모래언덕이 형성되고 있지만 이들 모래가 곰솔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곰솔 밭에 모래와 소나무 그리고 사구식물들만 있었는데 지금은 제방으로 인해 더 이상 모래가 공급되지 않고 있으며 식생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 곰솔숲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습지자리와 뚜껑이 덮인 우물
ⓒ 김준
생명의 공간, 성스런 공간

관매도의 오래된 토박이들은 닻배를 이용해 칠산어장에서 조기를 잡았다. 오직 기댈 곳이 바다밖에 없었던 관매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보고 배를 움직이는 기술이 발달했던 것이다.

당시 배들은 닻배, 즉 풍선배로 오늘날 십여 톤의 유자망배에 못지 않은 크기로 뒤에서 바람이 불면 돛을 펴고, 맞바람이 불면 갈지자로 노를 저어 위도, 법성포 인근 해역까지 갔었다. 당시 칡넝쿨을 이용해 닻줄을 만들고, 수십 가닥의 짚을 꼬아 돛 줄을 달아 십여 명이 돛을 올리고 내렸다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관매도 어민들은 인근 삼월 삼진 날 제비가 올 무렵 쿠루시오 난류를 타고 산란 지역을 찾아 올라오는 조기를 좇아 풍선배를 끌고 조도열도, 흑산도 홍도, 칠산어장, 위도파시, 연평도까지 긴 바닷길에 오르기도 했다.

관매도 최생기 이장은 지금 목포, 군산 등 서남해에서 이름난 뱃사람들 중에는 관매도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광굴비가 영광사람들이 잡은 것이 아니라 '관매도', '조도' 사람들이 잡아서 가지고 갔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어디 그런 일이 세상에 한둘이겠는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 세상이다 보니 조기가 어떻게 밥상에 오르는가, 요즘 한철인 주꾸미가 작년에 비해서 비싼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위도 핵폐기장, 새만금 등이 시끄러울 때 도회지 사람들이 우리 동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 밥상과 직접 관련된 일들이다.

어쨌든 그렇게 한참 잡이 배를 많이 타던 시절에는 마을에서 곰솔숲으로 가는 초입에는 커다란 후박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작은 당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매년 정월이면 이곳에서 풍어제를 지냈다고 하니 아무래도 조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그 당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작은 울타리를 치고 후박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이 후박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후박나무를 즐겨 찾는 흑비둘기 외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여름철 관광객들이 지나다 그늘 아래 잠깐 쉬어갈지 모르지만. 우연인지 모르지만 1975년 당집이 없어질 무렵 관매도에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 당집이 있었던 곳에 후박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김준
우리의 생활 민속에 대한 편견을 이곳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후박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그곳 아래 있었던 작은 당집은 모두 청소해버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행정기관에서 그 아래 지저분한 당집 나부랭이가 있어서 되겠냐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유사한 사례를 2000년 흑산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흑산도 상라산성 밑에는 작은 절터와 탑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법 오래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연구팀이 1999년 무렵에 그곳을 찾았을 때 느티나무 옆에 탑과 함께 주민들이 정성을 드리던 작은 당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작은 돌담이 이를 둘러싸고 사위질빵을 비롯한 넝쿨식물들이 돌담을 덮고 있었다. 2000년 이곳을 찾았을 때 돌담대신 철책이 둘러싸여 있었고, 작은 당집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주변은 넓적한 돌들을 주어다 구들장을 놓듯 깔아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당집 나부랭이는 인근 숲과 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지금처럼 어탐기도 엔진도 없던 시절,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야 했고, 물빛과 하늘의 조짐, 새와 바람을 보고 날씨를 예측해야 했던 시절에 섬에 남은 사람들이 기댈 수 있었던 곳은 후박나무 밑 작은 '당집'이 전부였을지 모른다.

사흘 날씨를 볼 줄 알고, 조기 길을 알고 그물을 놓을 줄 알아야 최고 선장으로 쳐주었던 시절에 섬에 남은 사람이나 바다에 조기를 좇는 사람이나 모두 곰솔 숲은 성스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바다에 나고들 때 늘 지나가야 했던 그 숲과 당집은 생명의 숲이요 경외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라. 만약 해수욕객들이 즐기는 공간과 주민들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숲이 발달해 있는 곳에는 늘 신성한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뱃일을 하는 곳은 풍어를 기원하고, 해초를 뜯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김, 가사리, 미역, 톳 등 해초들이 바위에 잘 붙기를 빌었을 것이다. 물론 마을의 궂은 일이 생기는 일을 막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을 숲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액을 막는 일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주민들의 생명 숲인 경우가 많다.

한국어린이 식물연구회의 한동욱 대표는 관매도를 돌아보고 나서 관매도의 자랑 두 가지를 꼽았는데 그 중하나가 곰솔 숲으로 전국에 대표적인 인공 조림숲이며, 다른 하나는 해안가를 끼고 방아섬까지 이어진 오솔길에 다양한 식물과 경관이라고 지적했다.

이 오솔길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한참 사람들에게 오르내렸던 '발리섬'의 풍광을 넘어선다고 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는 이곳 오솔길은 방아섬까지 어른 걸음으로 40여 분 가량 이어진다. 바닷가로 내려가면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오솔길로 올라오면 다양한 난대성 대성 식물들이 즐비해 어디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해양생물과 육지생물을 함께 볼 수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 곰솔숲속 배고픈 시절에 허기를 지웠던 파리똥나무(보리수나무)
ⓒ 김준

▲ 방아섬으로 가는 오솔길에 맞난 솔붓꽃.
ⓒ 김준
그런데 불행히도 곰솔 숲의 많은 소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최근 소나무 에이즈라고 불리는 '재선충'인지 더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아직 작은 섬까지는 행정이 미치지 않는지 관심이 없다.

해안가로 난 오솔길은 폭 4미터의 포장도로를 만들기 위해 국립공원과 군, 주민들이 논의 중이라고 한다. 경사지에 포장도로는 말이 4미터지 절개지까지 고려한다면 10미터가 넘는 곳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섬 지역 도로공사를 해본 전문가들의 이야기이다. 해안선 근처의 생태계는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노령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양식장에 접근하기 위해서 포장도로가 필요하다는 논리이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몇 년이나 사용하지 모르는데 해안도로로 내야 하는지 하는 의문도 든다. 당장 생업을 위해서 필요하다지만 뱃길로 양식장까지 이동할 수 있다면 생태자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주민들의 생업도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개발하는 것은 이제 지양되어야 하며 나중에 다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국립공원, 그리고 지역의원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바다와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가칭)' 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독자들 중에 뜻을 같이 하는 분이 있다면 의견을 주십시오. 어떻게 만들지, 무엇을 할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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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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