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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 모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보통 여름 한철 발 디딜 곳이 없지만 이제 겨우 송곳 같은 바다 바람이 무디어질 무렵인데 해수욕객도 아닐 텐데. 사실 관매도(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소재)는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늘 가보고 싶은 섬이었다.

관매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군락을 이룬 곰솔을 떠올릴 것이다. 나도 그랬다. 곰솔 숲길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솔향기를 맡고, 비온 뒤 끝이라 황사도 없이…. 피서철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관매도를 찾는 것은 그 곰솔 숲에서 벌어지는 풍란 자생지 복원사업 때문이었다.

▲ 곰솔 숲에 풍란을 붙이고 있는 주민, 진도실고학생, 대학생, 연안보존네트워크 등 자원봉사자들.
ⓒ 김준
도대체 그 많던 풍란은 왜 사라졌을까

풍란은 바람을 타고 그 향기가 수십 리를 간다고 했서 '풍란'이라고 했다던가. 어떤 이는 바람을 타고 씨가 이동하며 번식하기 때문에 풍란이라고 했다. 풍란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5~6월로 이 시기는 일교 차가 심하여 바다에 안개가 가장 많이 오르는 계절이다. 소나무나 바위에 자라는 풍란이 내는 향기는 뱃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풍란은 1997년부터 환경부가 멸종위기 보호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희귀식물이다. 1980년대 후반에 자생풍란은 자생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관매도 토박이 박영봉씨는 풍란이 이렇게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자신의 어렸을 때 기억으로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30여 년 전 뒷산에 조금만 들어가면 풍란을 포대로 하나씩 캐다가 주었다. 선생님들이 가져오라고 하니까. 공책도 주고 상장도 주고, 결석해도 잡지 않고.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은 풍란을 가져다 주고 받은 파란 스파이크다. 선생들만이 아니라 당시 경찰들도 들어오면 으레 풍란을 요구했다."

파란 스파이크. 얼마나 갖고 싶은 운동화였던가. 가죽으로 댄 축구공은 물론 고무공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마을에서 대장 노릇을 했던 시절에 스파이크라도 신는다면 요즘 뜨고 있는 박주영도 박지성도 부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박씨는 가슴 아픈 기억도 토해냈다. 친구 중에는 선생님이 풍란을 가져 오라고 해서 산 속 벼랑으로 들어갔다가 돌이 떨어져 장애인이 된 친구, 나무에서 떨어져 불구가 된 친구들도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고 한다. 산골이나 농촌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산감' '세무서직원'이었던 것처럼, '섬'에서는 선생과 순사 등 '공무원'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나무하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었던 시절에 '생솔가지'를 해오거나 '가리나무'(떨어진 솔잎)를 긁어 오는 일은 어지간하게 간이 크지 않으면 하기 어려웠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산감'을 만나면 슬슬 피해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수색영장도 없이 불쑥 집에 들어와 나무 곳간을 뒤지고 부엌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가정집에서 술을 빚는 것을 금하던 시절에 안방까지 들어와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제사, 농사 등 큰일을 치르기 위해서 꼭 술을 빚어야 했던 사람들은 대밭이나 땅 속에 묻기도 했다고 하니.

사실 이런 것이 40대나 50대의 섬사람들이 일찍 분재, 수석, 춘란이나 풍란 등 희귀식물에 눈을 뜬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러다 외지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거나 대접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그 걸로 대신했다. 이러다 섬사람들도 이게 돈이 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보이는 대로 남획했다. 벼랑 끝, 인근 무인도 등등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 현지에 풍란이 제대로 남아 있겠는가.

▲ 시중에서 구입한 풍란으로 자생지 복원 가능성을 시험하게 된다.
ⓒ 김준
'바람난'을 만나다

희귀식물 풍란의 자연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 거의 포기하고 자생하고 있는 곳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무렵 기적처럼 관매도의 토박이 박영봉씨를 만났다. 관매도와 인근 바다를 손금 보듯 파악하는 그가 관매도에 풍란이 서식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2002년 여름 조정일 전 진도풍란보존회 회장과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이 박씨의 도움을 받아 바위에서 풍란 2촉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음해 초여름 꽃을 피울 무렵 포자 채취를 위해 그곳에 갔다가 아연 실색을 하고 말았다. 어렵게 찾아낸 풍란이 사라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외지인에게 팔리기 전에 주민의 도움으로 복원할 개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이 진도로 돌아오는 뱃길에서 어렵게 구한 그간의 고충을 이야기하다 나온 '바람난 풍란'은 캐릭터를 '바람난'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 2003년 부착한 풍란
ⓒ 김준
▲ 2005년 부착한 풍란
ⓒ 김준
풍란 붙이는 일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 동안 6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계속하고 있다. 매년 5000천 촉 정도의 난을 분교 옆에 붙였고 금년에는 해수욕장 인근에 붙이고 있다.

작년에 부착한 것 중에 3.50m 높이까지의 난들은 거의 사라졌다. 이 높이는 사람들이 쉽게 뜯어 갈 수 있는 높이다. 그래도 어린이들이 쉽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높이 붙이는 것의 한계가 있다. 이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순천향대학교 신현철 교수는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붙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금년에도 그 높이에 많이 붙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풍란을 붙이고 나면 붙인 시기, 높이, 방향 등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기에 곰솔에 착상해 자라는 과정을 모니터링한다. 작년에는 벌써 착상해 꽃을 피운 난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기록을 하고 꽃을 전부 제거한다. 아깝지만 할 수 없다.

매년 3천여 촉의 풍란을 곰솔에 부착하는 것은 관매도에서 어렵게 확보한 자생풍란 '바람난'을 옮기기 위한 시험 재배인 셈이다. 시험 재배에서 잘 자라는 방향, 높이 등을 연구 조사하여 실제로 '바람난'을 옮겨 심을 때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시중에서 구입해서 붙인 풍란은 꽃이 피면 모두 제거한다. 관매도 자생풍란을 보존해야 하기 위해서다.

▲ 이장님도 풍란 붙이는 일에 나섰다.
ⓒ 김준
▲ 풍란을 붙이기 전에 손질을 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
ⓒ 김준
'바람난', 관매도의 희망이다

관매도에 몇 달 전에 청년회가 만들어졌다. 청년회를 조직하는 계기가 된 것도 관매도 '바람난' 때문이다. 바람난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학자, 시민단체, 동호회 모두 외부 사람들이다. 아무리 열심히 곰솔에 풍란을 붙이고 모니터링한다고 한들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들이 어떻게 1시간이 훨씬 넘는 뱃길을 타고 들어와 살펴보고 관리하겠는가.

곰솔을 가꾸고 애정을 주지 않으면 풍란 복원은 의미가 없다. 관매도 풍란을 복원하는 일은 관매도 마을 숲을 보전하는 일이고 마을 공동체를 지탱하는 일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회가 만들어진 것은 천만 다행이다.

처음 외지 사람들이 관매도에 들어와 풍란을 복원하자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의심했다. 또 무슨 속셈이 있나 싶어서. 늘 당하고만 살아왔기 때문에 본능적인 자기 방어 기제라 할 수 있다. 이장님을 설득하고 청년들을 설득하고, 여기에 진도풍란보존회 만들어지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주민들도 조금 조금 다가왔다.

첫날 풍란 붙이는 일은 최생기 이장님을 포함해 청년, 주민 20여명이 참여했다. 배를 타고 들어온 진도풍란보존회, 진도실고 학생들, 순천향대 팀, 연안보전네크워크 팀 등 30여명을 포함해 50여명이 일을 마치고 마을회관에 모였다. 그 동안의 풍란 붙이기 사업에 대한 평가와 청년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뭐가 아쉬워서 이 고생을 하는지, 대학 교수님이…."

자주 와서 죄송하다는 신 교수의 인사에 대한 이장님의 답변이다. 신 교수는 관매도를 어떻게 하면 풍란 지대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관매도에 오면 올수록 주민들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느낀다고 한다.

▲ 진도풍란보존회 박종규 회장이 디지인한 바람난 캐릭터. 박 회장은 진도출신으로 한국문인협회 김포시부지부장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 김준
▲ 바람난 캐릭터를 이용한 잔받침
ⓒ 김준
그렇다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부 주민, 청년들은 현실적인 요구를 하기도 한다. 마을 숙원사업인 해안 도로를 내는 일이며, 풍란을 사업화해서 소득 증대를 꾀하고자 한다.

그래서 풍란 복원팀은 조심스럽다. 주민들과 함께 해야 사업에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여름철 관매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미역과 톳 외에 관매도 풍란을 팔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바람난'은 시중의 '풍란'처럼 쉽게 자라질 않는다. 적여도 3~5년은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신 교수 일행은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은 보존하고 관리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마음이 급하다.

▲ 풍란 부착을 마치고 마을회관에서 주민과 함께 모여 사업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 김준
'바람난'을 둘러싸고 생물학자가 접근하는 것과 마을 청년들이 접근하는 것이 다르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머리를 맞대고 마을회관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신 교수팀은 엽서, 사진, 캐릭터를 이용한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진도풍란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박종규 회장이 디자인한 진도의 '바람난'은 컵, 모자, 잔 받침 등 다양한 상품에 이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곰솔 숲 안에 마을 화단을 만들어 후박나무 등 관매도 식물을 심어 후계목으로 이용하고 관광객들의 쉼터로도 이용할 계획이다.

욕심이 많은 청년들, 그들만의 탓은 아니다. 먹물 좀 들고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급하다. 서울 근교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관매도에 있는 '곰솔' 한 그루라도, '후박나무' 한 그루라도 있다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부러울 것이다.

사실 주민들에게도 곰솔 숲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무가 귀하던 시절에도 함부로 곰솔 숲에 들어가 솔잎을 긁지 못하게 했고, 분교 앞에 있는 후박나무 당집에서 매년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곳은 성스런 공간이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부착한 풍란을 모두 떼어 내고 관매도 토종 풍란 '바람난'이 붙여질 것이다. 부디 관매도 마을 숲 곰솔이 '바람난'의 기운을 받아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의 쉼터를 넘어 관매도 주민들의 상징적 공간으로 살아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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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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