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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 이 립스틱 나 안쓰는데 엄마 쓸 거야?"
"이 가방 맘에 들어? 들고 다닐려고 사긴 했는데 지금 보니까 엄마가 더 잘 어울린다."
딸이 쓰던 물건도 좋다시며 받아 가는 엄마는 늘 웃는 얼굴이다.

엄마에 관한 몇 가지 기억들. 어린시절 엄마는 학교에서 필요한 돈이 있으면 늘 전날 저녁에 말하게 했는데 이유인즉은 돈이 없더라도 옆집에 가서 빌릴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시험 잘 보면 옷을 사준다네 자전거를 사준다네 했다며 자랑들을 해댔지만 엄마는 단 한번도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신학기가 되어 친구들이 옷을 사네 가방을 사네 하며 신나서 다닐 때도 엄마는 한 번도 함께 가방이나 옷을 사러 다니지 않았다.

역시나 어린 시절 나는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러 간다는 엄마의 말을 들은 적이 없으며, 당신의 옷이나 화장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미장원에 다녀오는 엄마를 본 기억도 별로 없고 옆집 아줌마와 수다 떠는 엄마를 본 기억도 없다.

일찍 결혼하여 다른 엄마 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는 항상 부업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마늘을 까고, 완성된 팬티의 실밥을 따고, 과수원 일도 해주고, 동네에서 하는 누에고치 집에서 누에도 따고 간식으로 빵을 줄라치면 안 먹고 가져와 자식들 주기에도 바빴다.

엄마는 뭔가를 갖고 싶거나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뭔가를 바라는 엄마의 말을 들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엄마는 참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봄이 와도 엄마는 꽃구경 갈 시간도 없이 늘 일을 했고, 겨울에 아빠가 일이 없어 쉴 때도 엄마는 식당으로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갖지 않아도 욕심 안 나고 쉬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는 엄마. 자식이 하는 걸로도 만족해 하는 엄마는 그냥 엄마였다. 자신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너무 당연한 엄마는 내게 여자가 아니라 날 때부터 엄마였다.

남자를 만나 사랑이란 걸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도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내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배고프면 먹어야 했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 했다. 여전히 옷매무새에 신경이 쓰여 다이어트를 하는 나는 내 엄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엄마가 되었다.

이제 나는 지난 날 내 기억 속의 엄마가 얼마나 많이 참고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낡은 화장대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갈래머리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담긴 사진이 밖으로 나올 수 없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열아홉에 사랑을 하고 스무살에 아기를 낳고 없는 집에 시집와 먹고 사는 게 더 급했던 여자인 나의 엄마.

예쁘게 화장하고 나서는 딸을 보면서 당신이 화장하고 나선 양 좋아만 했던 웃음 뒤로 당신의 욕심을 감추셨던 여자인 엄마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딸이 쓰던 립스틱도 웃으며 받아 가는 나의 엄마는 참 귀엽다. 작은 가방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는 엄마는 "내가 다 가져가면 넌 뭐 갖고 쓰냐"시지만 그럴 때 나는 엄마 마음이 되어버린다. 줘도줘도 아깝지 않고 더 주고 싶은 엄마 마음.

어린시절 내게 보여주었던 엄마처럼 나는 하지 못한다. 나는 한 남자의 아내요, 한 아이의 엄마지만 동시에 나는 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도 가정도 소중하지만 나를 포기할 순 없다. 내가 엄마를 여자로 보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는 내게 여자이면서 동시에 나와 같은 욕심을 가진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는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엄마와 나는 부모와 자식이기도 하지만 공유할 것이 많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이기도 하다. 가끔 엄마와 같은 물건을 갖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나는 기분이 좋다.

엄마가 엄마의 욕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엄마와 나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귀기울여 주는 여자친구, 그 친구를 나는 아이를 낳고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늘 나와 함께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여자친구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던 그 친구에게 줄 것들을 찾고 있다.

나는 엄마에게서 받는 것이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여자라는 걸 알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르겠다. 자궁경부암 수술로 많이 힘들었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늘 함께 했던 나의 소중한 여자친구, 엄마. 그 여자친구가 지금까지의 내 삶을 묵묵히 지켜주었듯이, 이제 내가 이 '여자친구'를 가까이에서 지켜줄 것이다. 이 글은 그 시작을 알리는 고백이다.

덧붙이는 글 | 사람마다 세상사를 보는 눈은 다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줌마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거창하게 페미니즘을 말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아줌마들의 시각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아줌마들만 봐!'연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부터 약 2주간 한 편의 글이 '아줌마들만 봐!' 타이틀로 오마이뉴스에 연재될 것입니다. 남편을 말한다.(2월 18 ~19일), 결혼을 말한다(2월 20~22일), 아줌마를 말한다 (2월 23~ 26일), 육아를 말한다(2월 27~ 3월 1일), 나를 말한다(3월2일~ 4일)의 소제목에 따라 각각 두세 편의 글을 올립니다.

 마침 2월 22일은 오마이뉴스 창간 2주년입니다. 우리는 이 기획연재에 아줌마 뉴스게릴라들의 동참을 기꺼이 환영합니다.
- ' 아줌마들만 봐!' 연재 참가자 일동

'아줌마들만 봐!' 연재에 우선 참여한 사람들은 아줌마들의 인터넷 해방구인 웹진 줌마네 (www.zoomanet.co.kr)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줌마들입니다.
이번에 글을 쓴 김선희는 서른의 강을 넘어 여자를 생각하는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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