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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이렇게 쓰고 보니 문득 동명의 영화가 떠오른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90년도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가 되었던 남편의 폭력에 관한 영화였다. 3년 동안 남편의 의처증과 결벽증을 견디다 못한 주인공이 결국은 치밀한 준비 끝에 도망치지만 집요한 남편의 추적에 발각되고 만다. 주인공은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손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영화처럼 폭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부부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얼마간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탓이다. 왜 제목을 '적과의 동침'으로 했을까? 적이란 바로 남편을 말함인가? 남편이 왜 적일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살면서 남편과 부딪히게 될 때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우리 남편은 별로 문제가 없는 편이다. 사소한 집안일을 부탁하면 잘 들어주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청소도 가끔 해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 남편의 가장 큰 문제는 술이었다.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 번 마셨다 하면 꼭 사고를 치고 와 속을 태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결혼 전부터 술 때문에 많이 싸웠는데 그 정점은 셋째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안 그래도 임신해서 두 아이들과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어찌나 화가 나는지 이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살자니 내 꼴이 너무나 한심해 보였다.

남편의 개인사라 시시콜콜 말하기는 뭣하지만 택시에서 내리지 않아 옆집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해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적도 있었고, 경찰차를 타고 온 날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걸 누가 신고한 모양이었다. 퍽치기도 당했고, 지갑을 잃어버려 카드분실신고도 여러 번 했다. 잃어버린 것으로 치면 안경에, 주머니에 넣어둔 넥타이며, 핸드폰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한 번은 새벽 4시가 되도록 소식이 없어 잠도 못 자고 있는데 형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군가 남편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은 모양인데 조사에 필요하니 주민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알려주고는 남편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대신 알아봐준다고 한다.

잠시 후 걸려온 남편 친구는 그런 형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제야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남편이 카드 비밀번호를 주민번호에서 따지 않아서인지 카드에서 현금인출이 되지 않았다. 그 날도 남편은 술이 떡이 되어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건지 물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온 날은 며칠간 냉전이다.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다. 화가 나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고민도 되고 복잡한 심경에 쳐다보기도 싫은 날이 며칠간 이어지다 보면 남편도 말을 하지 않아 어색하게 시간만 흘러간다. 결국 내가 먼저 지쳐 소리를 지르게 된다. 남편은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웃기만 하고 미안하다고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영부영 상황 끝! 임신으로 배불러서도 술 먹은 남편을 데리러 한밤중에 회사로 가기도 수 차례, 얼러도 보고 울기도 해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사고를 치는 통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이러다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연애할 때의 사랑이며 열정은 어디로 가고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투쟁이고 전쟁이었다. 나는 부부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살을 맞대고 아이를 낳고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무얼 보고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살다가 행여 이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남보다 더 생뚱맞은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남편인 것이다. 항상 요만큼만 더하자, 나중에 혹 법정에서라도 할 말이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살자 했지만 이게 아닌데 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다행히 남편은 술을 끊었다. 그것이 내 내조 덕분인지, 자신의 의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술을 먹고 들어온 적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끊긴 끊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술이 가장 큰 문제여서 다른 문제들이 가려진 것이지 술이 해결되고 나니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아직은 이렇다 말할 거리가 되진 않지만 살면서 자주 부딪히게 되기 때문에 평생 살면서 싸우고 타협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내게도 문제는 있다. 아이들을 핑계로 좀더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가 부부란 같은 길을 걸어가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코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그들은 그럴지 몰라도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아줌마들은 부부생활이 결코 아름답지도 쉽지도 않은 길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편이 완전히 내 취향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 또한 남편의 의도대로 길들여질 생각은 없다. 다만 서로를 받쳐주며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가야 할 듯싶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매일 매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난 '적과 동침'하며 산다.

덧붙이는 글 | 사람마다 세상사를 보는 눈은 다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줌마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거창하게 페미니즘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아줌마들의 시각으로 전하고자 할 뿐입니다. 

'아줌마들만 봐!' 연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부터 약 2주간 한 편의 글이 '아줌마들만 봐!' 타이틀로 오마이뉴스에 연재될 것입니다. 남편을 말한다(2월 18∼19일), 결혼을 말한다(2월 20∼22일), 아줌마를 말한다(2월 23∼26일), 육아를 말한다(2월 27∼ 3월 1일), 나를 말한다(3월 2일 ∼ 4일)의 소제목에 따라 각각 두세 편의 글을 올립니다. 

마침 2월 22일은 오마이뉴스 창간 2주년입니다. 우리는 이 기획연재에 아줌마 뉴스게릴라들의 동참을 기꺼이 환영합니다. - '아줌마들만 봐!'연재 참가자 일동

'아줌마들만 봐!'연재에 우선 참여한 사람들은 아줌마들의 인터넷 해방구인 웹진 줌마네(www.zoomanet.co.k)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줌마들입니다. 
이번에 글을 쓴 이현주는 아이 셋을 둔 전업주부로 앞으로 글쓰기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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