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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전에 젊은 고교생들이 목숨을 바쳤는데 이번 대우차 강제진압을 보니 또 다시 독재자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다."
4. 19 41주년이 되는 날에도 과거의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독설은 식을 줄 몰랐다.

41년 전 4. 19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41년 후의 우리 정치권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적어도 오늘의 정치 상황은 아닐 것이다.

19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지도부들이 오전 9시를 전후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수유리 4. 19 묘역'을 참배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19일 아침, 새벽잠을 물리치고 취재수첩을 들었다.

7시 15분 민주당을 출발해 수유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 버스에는 김중권 대표, 박상규 사무총장, 전용학 대변인 등 70여 명의 당직자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8시 25분 수유리 묘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대중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는 참배를 끝내고 돌아간 상태였다. 오전 7시 20분에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가 김종호 총재권한대행, 이양희 사무총장 등과 함께 첫 테이프를 끊었다고 한다.

김 명예총재는 1960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내다, 1961년 중령으로 5·16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참여, 1963년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4. 19로 싹튼 민주화를 군화발로 짓밟은 원흉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킹 메이커'를 자처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만섭 국회의장은 8시를 전후로 다녀갔다고 관리인이 전했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4.19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다. 1961년 9월 동아일보 필화사건으로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시 30분 김중권 대표를 필두로 한 민주당 당직자들의 헌화와 분향, 유영봉안소 방문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대표는 유영봉안소 방문록에 서명할 시간도 없었는지,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홀트 일산 장애인복지타운으로 향했다.

김대표가 헌화탑을 도는 순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분향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갔다. 4. 19 당시 김대표는 고려대 2학년 재학 중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수배를 받기도 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김대표에게는 오늘 장애인 복지타운 방문이 더욱 더 바쁜 듯 보였다.

8시 45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엄숙한 표정으로 박종철 열사 묘를 어루만지며 회한에 잠긴 듯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몰락을 당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영령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김 전대통령이 묘역을 나서 차에 타려는 순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김 전대통령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차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묘역에 들어섰다. 9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4. 19 당시 고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박명환 의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홍사덕 국회부의장, 이부영, 손학규, 김기배, 서상섭, 이재오, 김문수, 맹형규 의원 등 30여 명의 소속의원들과 함께 참배를 왔다.

이총재는 4. 19 당시 서울지법 판사였다. 이후 5.16 군사쿠테타 정부의 혁명재판부 제2부 심판관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일보사 조용수 사장의 사형선고에 재판관으로 참여한 일은 이미 정가에 퍼져 있는 이야기다. 묘역의 비문을 일일이 확인하며 포즈를 취한 이 총재는 유영봉안소를 들른 후 서둘러 돌아갔다.

오늘 묘역을 찾아왔던 정치인들을 바라봐야 했던 4. 19 영령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누구 말대로 4. 19는 이제 우리의 가슴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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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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