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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고의 역사관에는 4.19 사진 두 장이 전시돼 있다. 한 장은 당시의 대광고생들이 광화문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이는 사진이며, 한 장은 이동범 교사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글/최경준 기자
사진/이종호 기자



41년전 4월 18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담벼락이 무너져 내렸다.

12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듯 담벼락은 고등학생들의 여린 손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담벼락은 처음으로 시위에 나선 고려대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무사히 국회의사당까지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위치한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날의 주역 같은 조역.

4 ·19 특별수업 현장중계 / 김정훈 기자


무너진 담벼락

60년 4월 18일 월요일 오후 1시경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짠 후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안암동 로터리 지서 앞에서 방망이로 무장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대광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안암 제2교까지 몰려와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경찰은 시내 진입을 시도하는 고대학생들을 막기 위해 대광고등학교를 등진 채 안암 제2교를 최종 저지선으로 정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운동장에 나와 있던 대광고 학생들은 이 광경을 보게 됐고 언덕과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자신들을 등진 채 고대생들을 막고 있는 경찰을 뒤에서 돌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주위의 돌을 주워 던지던 대광고 학생들은 돌이 모자라자 학교 담벼락을 무너뜨려 깨기 시작했다. 결국 대광고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고대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한다. 대광고 학생들은 다음날인 4월 19일에도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밀가루 부대로 플래카드를 만들고 스크럼을 짜서 거리에 나섰다.

대광고등학교 탁준호(62) 교장은 "당시에 대광고 학생들이 아니었으면 고대생들이 시내로 진입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힘들었을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김대영 선생님이 준비한 오늘의 특별수업 '4.19'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1년 '4·19혁명' 특별 수업

41년이 지난 2001년 4월 19일 대광고등학교 교정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침 10시 35분, 3층에 위치한 1학년 2반 학생 두세 명이 수업 교재를 옮기기 위해 바쁘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도서관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50년사>를 전부 교실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김대영(52, 사회) 교사 역시 수업준비에 정신이 없다. 아이들에게 영상물을 보여주려고 비디오를 가지고 왔는데 마침 고장이 난 것이다. 다시 한 학생을 시켜 비디오를 바꿔오게 했다.

40분,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3교시 '사회'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 수업은 '4·19 혁명' 기념 특별 수업이다. 평소 같으면 수업 시작하고도 10여분을 더 떠들고 장난치며 소란해야 할 학생들이 오늘만큼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김대영 교사는 칠판에 '4·19혁명'이라고 흰색 분필로 또박또박 적었다. 49명의 학생은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김 교사를 주목했다. 김 교사는 한 학생에게 <대광고등학교 50년사>중에서 '4·19혁명과 대광'이라는 부분을 낭독케 하며 짧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교과서에 기록된 4.19는 화석화된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4·19혁명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고 민주국가로 가는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김교사는 계속해서 "대광고가 서울시 고등학교 중에서는 제일 먼저 학생시위에 나섰다"며 "고대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게 된 것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학교 학생인 만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김교사가 준비해온 비디오 테이프를 상영했다. 이 테이프는 'KBS 영상실록-해방 50년'중 4·19 혁명 부분만을 따로 편집해 전교조에서 배포한 것이다.

교실 왼쪽 상단에 위치한 TV에서 흘러나오는 흑백 필름이 학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한 채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사진이 보여지자 아이들은 일제히 '우와!'하고 탄성을 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조영훈 군은 "흑백필름이라서 더 실감이 난다"며 "고대 학생들이 4월 18일 정치깡패에게 폭행 당한 장면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제일 뒷자리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김형주 군은 "우리 학교 선배들이 먼저 (데모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한테 자랑도 했었다"고 말했다.

만일 그 당시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 김군은 "총도 쏘고, 때리고... 그렇지만 우리 대통령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기분이 나빠서 사람들 뒤에서라도 거리에 따라 나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교사는 수업을 끝내면서 "4·19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폭력과 부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은 반드시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혀 무너진다는 것"이라며 "지금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희생 탓이므로 그 빚을 갚기 위해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11시 30분 수업이 끝나는 벨이 울렸다. 김교사가 교실을 나서자 학생들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듬성듬성 모여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연예인 사진을 들여다보며 웃고, 떠든다. 학생들 사이로 다시 들어가 수업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몰랐던 것을 알게 돼서 좋았어요."
"원래 애들이 안 그랬는데 수업시간에 조용해졌어요."
"비디오는 좋았는데 우리들한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봤으면 더 좋겠어요."

41년이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이 학생들에 4·19혁명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동대부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김현수(38) 교사는 "4·19혁명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학생이 주축이 돼 정권을 바꾼 시민혁명은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민중, 노동자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민주시민이라는 자부심, 시민혁명을 통해서 얻어진 민주주의의 소중함 등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4·19혁명은 어쩔 수없이 체제 저항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육당국자들은 4·19혁명이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현재의 학생운동과 결부시켜 4·19혁명 관련 교육이나 행사를 기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상준(대광고 국사,46) 교사는 "교육당국자들이 4·19 혁명을 3·1절처럼 민족의 중요한 기념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며 "특히 4·19학생혁명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학생운동과 연계시킨다고 생각해 대부분 4·19혁명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41년전 대광고 학생들이 담벼락을 무너뜨려 돌을 던졌던 언덕에 올랐다. 학교를 감아 도는 무명의 실개천만을 남기고 41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따가운 4월 햇살을 받으며 '사월학생혁명기념탑'에 새겨져 있는 문구를 되뇌이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다음은 <대광고등학교 50년사>에 실려있는 학생들의 결의문이다.

"우리는 제 2세 국민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정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피로 물들고 때묻은 정사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 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묻은 국사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군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오. 결단코 독재 국가나 경찰 국가가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 학생들은 평화적인 시위로 시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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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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