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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 카이지의 <메두사>, 전 12권
가와구치 카이지의 <메두사>, 전 12권 ⓒ 서울문화사
가와구치 카이지에게 '바다'는 삶의 무대이며, 정치의 무대이다. <침묵의 함대>에서는 천재 잠수함장의 기상천외한 '독립'을 매개로, 핵을 보유한 5대 강국 간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스릴 넘치게 묘사했고, <바람의 아들>에서는 아버지의 고향인 '섬'에서 바다 사나이였던 아버지의 꿈을 찾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캐릭터 모두 성이 '가이에다'라는 점도 의외의 흥미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미국에 대한 일관적인 비판과 함께, '강한 일본'에 대한 열망도 동시에 느껴진다. 그는 언제나 작심하듯 자민당을 연상시키는 여당을 등장시키면서 회생 불능의 썩은 정당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새롭고 강력한 보수정당을 꿈꾸는 젊은 정치인을 등장시키는 설정이 잦은 편인데, 그의 정치적 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흥미롭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일면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하는 듯하면서도, 강력한 보수의 탄생과 미국에 대한 풍자와 비판, 그리고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자립을 꿈꾼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신군국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다.

그렇듯 그의 정치적 관점에 대해서는 독자들 사이에서 늘 논란이 벌어지지만, 그의 치밀한 심리 묘사와 정세 묘사, 해전에 대한 독보적인 묘사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바다'를 무대로 한 작품이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인간의 입장과 욕망에 충실하고, 전공투 세대들의 비애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바로 <메두사>다.

<모래시계>를 떠올리게 하는 가와구치 카이지의 <메두사>

@BRI@한국인이 사랑한 드라마 시리즈를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모래시계>는 386 세대의 치열했던 그 시절과 현실을 묘사한 드라마다. <모래시계>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같은 이상을 가졌지만 그 이상을 구현할 방법의 차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카지노 대부 아버지를 둔 '윤혜린'은 겉으로 봤을 때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온갖 비리와 뇌물, 정통성 없는 권력과의 영합을 통해 부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래서 그녀는 운동권에 투신했으며, 사랑하는 애인까지 삼청교육대로 보낸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물론 그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용서도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지만.

반면에, 그녀의 친구 '강우석'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의 부당한 압력으로 고향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법관이 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다. 운동권 학생들이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군부독재 청산을 위해 활동하고 있을 때도, 그는 오직 공부에만 매진한다.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그 스스로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함으로써 이상을 구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운동권 학생의 눈에는 그런 그가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래시계>는 가차없었다. <모래시계>는 '윤혜린'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카지노를 운영하게 만들었으며, 개혁과 민주에 대한 본질적인 이상도 '강우석'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실현하게 한다.

<메두사>를 보면서 놀란 이유는,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남녀가 <모래시계> 속의 두 캐릭터의 입장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수정치인인 아버지의 이면을 자주 목격한 딸 '요오코'는 운동권에 투신해, "그녀가 바라보면 누구라도 포섭된다"는 의미의 '메두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반면에 고아원에서 자란, 정치인의 양자 '테츠오'는 충실한 학생의 나날을 보내며, 양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을 물려받길 꿈꾸고 있다. 기회주의 정치인을 몰아내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겠다는 야망과 꿈은 비슷하다.

운동권과의 관련 여부와는 상관없이 '단카이 세대', 혹은 그들로부터 여전한 영향을 받고 있는 '신인류 세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화두인 것이다. 다만, <모래시계>의 두 남녀가 그랬듯이 '방법'의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는 이들을 비열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이 남녀가 걷는 저마다의 치열한 길을 통해 특유의 묘사를 앞세운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자민당(작품에서는 '민자당')에 대한 불신이 그려지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은 이번에도 거대여당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들며, 비전을 제시하는 강력한 보수정치인의 이상을 보여준다.

개혁과 혁명, 가와구치 카이지의 일관적인 주장은?

<메두사>
<메두사> ⓒ 서울문화사
공화정 로마 시절, 스키피오 탄핵을 주도한 카토는 로마의 변방 신인 출신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격퇴하자, 로마에서는 그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하는데, 카토는 그런 움직임에서 '황제로의 추대'라는 위험한 미래를 읽었다고 한다.

그가 고집스럽게 스키피오의 탄핵을 주장하면서 결국에는 관철시킨 이유는, 변방의 신인 출신인 자신을 중앙정치 무대로 이끌어준 원로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장래를 위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이에 대해 "이따금씩 발견되는 아웃사이더가 구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례"로 규정한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메두사>의 '테츠오'를 그런 존재로 그려나간다. '테츠오'가 야망을 이루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체제에 '일단' 순응하며 보수정치인의 양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드라마 시리즈 <하얀 거탑>만 봐도 알 수 있다. '장준혁'은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의사가 됐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출세에 대한 집요한 집념을 보여준다. 어렵게 얻은 길인만큼, 쉽게 추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세를 꿈꾸는 아웃사이더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보다,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빠르다고 믿는다. 가와구치 카이지의 보수적인 입맛에 제법 잘 맞는 설정이기도 하다.

사실 보수의 개념이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 탓에, 보수는 '완고함'으로 보이는 이면이 있지만, 보수는 완고함이 아니라 견고함이다. 지켜야 할 가치의 타락을 막고 그 가치의 실현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라고 할 수 있겠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보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작가다.

체제의 전복이 옳았을까? 아니면 메인스트림 내부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이끌어내는 개혁이 옳았을까? <메두사>를 통해 느껴지는 가와구치 카이지의 주장은 후자 쪽에 가깝다. 보수는 체제를 지키는 것에 역점을 둔다. 무능하고 타락한 자민당에 대한 일관적인 비판이 그가 생각하는 보수의 정체를 말해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침묵의 함대>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그는 '보수신당'을 묘사한다.

그는 <메두사>를 통해, 정치란 끝없는 현실적 투쟁의 연속이란 것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숙일 때 숙이고, 뛰쳐나갈 때 뛰쳐나가며, 결단은 과감하게 전개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의 유형을 '아웃사이더'를 통해 묘사했다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체제를 지키되, 환부를 도려내고 웅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이야말로 가와구치 카이지가 주장하는 '진정한 보수정치인'인 것이다. 그런 정치인은 그 현실적 투쟁을 통해 단련된다는 주장도 동시에 느껴진다.

<메두사>는 전공투 세대의 엇갈린 선택을 이야기하면서도, 앞서 이야기한 대로 '출세형 아웃사이더'에게 더 큰 역할을 맡겼다. '요오코'를 '메두사'로 설정하고, '타츠오'를 '페르세우스'로 그린 것은 인상적이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벰으로써, '페가수스'라는 천마가 태어났다. 그 천마가 진정으로 하늘을 날게 해 준 이가 '메두사'인지, 아니면 '페르세우스'인지 그에 대한 각자의 생각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그 비중을 '페르세우스'에게 두면서 이상적인 보수정치인의 유형을 그려나간 것이다. 과연 그의 주장대로 '전공투 세대'는 '메두사'일까? 세계시민주의와 보수주의를 폭넓게 섭취한 그의 선택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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