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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바벨2세>, 전 8권
정식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바벨2세>, 전 8권 ⓒ AK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금지됐던 그 시절, 일본의 유명 만화들은 '해적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었다. <동짜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도라에몽>이나, <베르사이유의 장미>, <유유백서>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요코야마 미쯔데루의 <바벨 2세>도 포함된다.

'요코야마 미쯔데루'라는 이름은 국내 각지의 도서관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바벨 2세>나 <철인 28호>와 <요술공주 세리> 등, 전국민이 다 아는 만화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총 60권 분량의 <삼국지>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도라에몽>, <드래곤볼>, <유유백서> 등, 과거에는 해적판으로 출간됐던 만화들이 이젠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출간된 마당에, 그의 대표작 <바벨2세>가 빠질 수는 없는 일. 어른들 사이에서 최고의 만화로 기억되는 <바벨2세>를 드디어 젊은 독자들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 문화 전면 개방 이후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된 일본의 대중문화 아이콘 홍수 속에서, 상업적인 관점에서는 시의적절하게 출간이 이루어진 듯하다.

사실 필자는 <바벨 2세>와 친숙한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우연히 해적판을 감상할 수 있었던 기회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기에, 정식 한국어판의 출간 소식이 반가웠다. 해적판이 해적판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의 기억을 이제는 좀 더 당당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벨 탑'이 선택한 '바벨 2세' 그리고 순결한 도덕

@BRI@<바벨 2세>는 전형적인 소년만화다. 생각해 보면, 거대로봇을 조종하거나 우주 악당으로부터 위험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이는 '소년'인 경우가 많은데, <바벨2세>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카미야 코우이치(해적판에서는 '영호')'는 매일같이 꿈에서 보였던 바벨 탑을 찾아내면서, 바벨 탑의 통제 컴퓨터로부터 '바벨2세'라는 호칭을 듣게 된다.그 설명에 따르면, 바벨 탑은 야훼를 분노케 한 노아의 후손들의 욕심으로 쌓여진 탑이 아니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통신시설이라고 한다.

그 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잠재력을 가진 '카미야'는 드디어 '바벨2세'라는 호칭과 함께 탑의 주인이 되는데, 그러면서 여느 소년만화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바로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그러면서 <바벨 2세>는 '요미'라는 강렬한 캐릭터를 내세운다. 만화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바벨 2세의 처신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강력한 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친구가 되면, 만화는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하기 어려워진다. <바벨 2세>는 그를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상천외한 초능력 진기명기(일명 '에너지 충격파'라는 그들만의 무기가 등장한다)를 보여준다.

'바벨 2세'가 '요미'를 적으로 규정한다는 설정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소년만화 특유의 정의에 대한 순결한 관념이 '바벨2세'에게도 적용되면서, '요미'는 악역이라는 위치로 내몰리게 된다.

사실 '요미'는 순결한 악(惡)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허전하다. '요미'는 그보다 먼저 바벨탑에 도달하면서, 마찬가지로 '바벨 2세'가 될 수 있었지만, '카미야'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쫓긴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가 '초능력자'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세계를 뒤흔들 만한 초능력을 가진 이상, 그에게는 인간이라면 피하기 어려운 야심을 갖게 된다.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꿈, 어쨌든 그 꿈의 규모는 능력에 걸맞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년만화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꿈이다. 소년만화에서 그리는 세계는 자유롭고 도덕적이다. 정치적인 야심이 통할 구석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른들의 정치 논리가 주된 지배 논리로 자리잡는다. '요미'는 '바벨 2세'를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한 전세계의 통치자들은 모두 부하로 삼고 있는 세계의 실력자다. '바벨 2세'를 죽이기 위해 총동원되는 거대한 기지와 기발한 초능력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도덕적으로 순결한 소년을 지구의 수호신으로 삼는 소년만화의 틀대로, '바벨 2세'는 '요미'를 막으려는 저항세력의 수호신으로도 자리잡는다. 소년은 미성숙했지만, '희망'이라는 남부럽지 않은 무기를 갖고 있다. 소년 그리고 소년의 순결한 도덕은 어른의 끝없는 욕심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바벨 2세>가 그리는 이야기, 그리고 '바벨 탑'이 '카미야'를 '바벨 2세'로 선택한 이유도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요미'보다 더 뛰어났다는 '바벨 2세'의 초능력의 원동력은 어쩌면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주된 틀은 훗날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로보>에도 이어진다.

'요미'에게서 엿보이는 카인 콤플렉스

오래 전에 돌아다녔던 해적판 <바벨2세>
오래 전에 돌아다녔던 해적판 <바벨2세>
'카인 콤플렉스(Cain complex)'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부모의 사랑을 더 차지하기 위해 형제간에 나타나는 적개심"을 말한다. <바벨 2세>의 '요미'에게서 엿보이는 콤플렉스다.

애초에 바벨 탑에 먼저 도달한 사람은 '요미'이지만,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바벨 2세'에게 주인 자격을 빼앗겼다.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 결정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요미'는 도덕적으로 더욱 순결하고 우월한 '바벨 2세'의 경멸의 눈초리를 읽는다.

'바벨 탑'을 중심의 위치로 놓는다면, '요미'와 '바벨 2세'는 형제로도 볼 수 있다. '바벨 탑'으로 인해 그들은 인연을 맺게 됐으며,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형보다 동생의 능력이 우월한 탓에, '주인공'의 자리는 동생의 차지가 됐다.

형으로서는 그 경멸의 눈초리까지 읽어버린 이상,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금 살아나는 그 의지의 원동력은 '카인 콤플렉스'로 보인다.

질투를 했고 위험을 느낀 이상 죽여야겠다는 결심은 굳혔지만, 그 능력의 열등 탓에 거사(?)를 성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바벨 2세>는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잘 팔린다는 현실을 이용해 대결을 끝없이 늘어뜨리는 전형적인 만화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최대의 적인 '요미'에게 그런 흥미로운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바벨 2세>는 그 전형성으로부터 살짝 비껴서는 매력을 과시한다. 이런 요소야말로 대작과 범작의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며, 대가의 통찰력을 맛볼 수 있는 독자의 행복이라 할 수 있겠다.

반갑다 <바벨 2세>

<자이언트 로보>의 한 장면
<자이언트 로보>의 한 장면 ⓒ 이마가와 야스히로
좋은 작품이 뒤늦게 '공식적인 빛'을 보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단지 '일본 만화'였을 뿐, <바벨 2세>는 해적판의 그늘에 숨기에는 아까운 만화였다.

만화의 주 독자층인 소년들을 열광시킬 요소들이 골고루 퍼져있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에 대한 작가의 흥미로운 통찰이 엿보이는 묘사도 이 작품의 '아까움'을 이야기하기 좋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만화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많이 누그러진 현실에서, 정식 한국어판 <바벨 2세>는 어른으로 하여금, 추억 속의 지난 날을 떠올리기 좋은 만화로 인식될 것으로 보인다. 그와 더불어 세대간의 '교감'을 이끌어내기도 좋은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바벨 2세>는 오래된 작품이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으며 여전한 품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바벨 2세>의 마니아를 자처하는 일부 올드 마니아들은 요코야마 미쯔데루의 또다른 걸작 <마즈>를 이야기한다. <마즈>에는 <바벨 2세>에서는 느끼기 어렵던 반전의 묘미가 매력 포인트라고 하는데, 언젠가는 이 작품 역시 정식 한국어판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몰래 봐야만 했던' 그 시절 어른들의 기억은 정말 옛 이야기가 돼가고 있다. 어른들의 옛 기억이 서서히 풀리면서, 만화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만화는 어른과 아이의 교감을 연결해 줄 소중한 연결고리다. <바벨 2세>라는 연결고리가 반가운 이유는, 만화 장르 특유의 매력을 알기에 그런 것은 아닐지. 꿈과 추억은 그렇듯 늘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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