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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는 그 사람이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두는 그 사람이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 김현
신발에는 그 사람의 삶이 묻어난다. 신발에는 그 사람의 향기가 숨어 있다. 유명상표가 붙은 신발이건, 이름 없는 싸구려 상표가 붙은 신발이건 나름대로 삶을 기대한다. 그리곤 그 삶을 함께 할 주인을 기다린다.

신발들은 석유냄새 나는 공장에서 나와 신발가게로 향한다. 어떤 신발은 고급 인테리어 시설이 되어 있는 곳에 진열되고, 어떤 신발은 국밥집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장통의 허름한 가게에 진열된다.

그곳에서 각자의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을 기다리며 어떤 주인을 만날까 기대도 하고 실망도 하지만 신발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한다.

@BRI@그러나 처음부터 인간이 신발을 신었던 것은 아니다. 발가숭이로 세상에 나왔듯이 발도 맨발이었다. 살가죽이었다.

그 살가죽의 맨발로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이라는 것을 만들어 신었다. 그 신발에도 빈부의 격차, 신분의 격차는 있어 있는 자와 높은 자는 가죽신을 신게 되었고, 없는 자나 노예는 짚신이거나 맨발로 세상을 걸었다.

지금도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어떤 이는 몇십만 원하는 고급신발을 싣고 세상을 활보하고, 어떤 이는 몇천 원짜리 신발을 신고 세상을 걸어간다. 어떤 이는 그 몇천 원하는 신발도 없이, 아니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다닌 살가죽 구두를 신고 음습한 지하보도 같은 데서 한뎃잠을 자는 이도 있다.

어떤 신발을 신었건 그 신발에는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다.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이 얼기설기 남아 그 삶을 창호지 넘어 비치는 호롱불처럼 비춰준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운동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운동화 ⓒ 김현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 손택수 시, '살가죽구두'


며칠 전에 12년 된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드렸다. 구두의 양 옆은 금이 가고 코숭이는 검은 살이 벗겨져 흐연 살점들을 밥풀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캥거루 구두약을 덕지덕지 칠하고 침을 퉤퉤 밭아가며 아무리 문질러도 오래된 세월의 때는 잘 닦이지 않았다.

장화
장화 ⓒ 김현
금이 간 구두는 아버지의 주름살만큼이나 두터웠고 무거웠다. 아무리 열심히 문질러대도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다. 굽을 보니 양 바깥으로 닳아 있었다. 구두를 닦다 말고 멍하니 구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밖으로 나오던 어머니의 "구두 닦다 말고 뭐하고 있어, 추운데 그만 닦고 방으로 들어가지"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마루 밑의 신발들이 보인다.

흙 묻은 장화도 있고, 지금도 논으로 밭으로 갈 때마다 신고 다니는 아버지의 운동화도 있다. 처음엔 순백의 살결을 지녔을 흰 고무신이 까맣게 때가 낀 모습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모두 아버지의 삶이 묻어 있는 신발들이다.

아버지는 철에 따라 다른 신발을 신고 삶을 살아오셨지만 그 흔적은 다름이 없었다.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아온 당신에게 흙 묻은 신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 번도 이름 있는 상표의 신발을 신은 적 없이 고무신, 장화, 값싼 운동화를 신었지만 아버진 모두에게 떳떳했다. 당신이 평생 밟고 온 흙처럼 정직했으니 말이다.

이에 비해 내 신발은 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비쌌다. 자주는 아니지만 2주에 한 번은 구두약을 칠하고 닦아주었다. 그렇게 닦고 닦다가 효용가치가 없으면 아무런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나에게 신발이란 것은 발에 끼워졌을 때만이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쓰다가 필요 없으면 버려진 신발. 그러나 시인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은 한 노숙자의 신발을 보곤 삶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노숙자의 발도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땐 곱고 보드라운 신발을 신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세상의 세파에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면서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벗지 못하고 신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시인이 말하고 있는 노숙자뿐이겠는가. 우리 또한 그 신발을 신고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결국 신발은 인간의 살가죽을 보호해주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투영해주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네가 걸어온 길
다시 돌아서 가면
내 살아온 흔적이 보이겠지

처음
곧았던 세상살이
굽은 길, 가파른 길 걸었던
닳고 닳은 뒤축을 바라보며
가끔은 쓸쓸하게 여유롭게
웃으며 바라볼 수 있겠지

그러다 깨닫겠지
토방에 가지런히 놓인
오순도순 모여 있는 신발 몇 켤레
작은 행복의 웃음소리인 걸

- 김산해의 시, '구두'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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