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국 최초의 주민발의에 의한 시립병원 설립 조례안 제정을 둘러싸고 시민 대의기관인 시의회 본회의장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5일 오후 열린 성남시의회(의장 김상현·한나라당) 제114차 임시회 2차 본회의에서 의장이 직권으로 '지방공사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 조례안'에 대한 심의를 보류하자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이 투입된 것.

▲ 25일 오후 열린 본회의에서 성남시의회 김상현 의장이 민주노동당 김미라 의원 등이 이의를 제기하며 회의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방적으로 산회를 선포하고 있다
ⓒ 서상일
이 자리에서 일부 의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회의를 계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상현 의장은 이를 무시하고 회의 시작 1분만에 일방적으로 산회를 선포한 뒤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성남시민 1만8595명의 서명을 받아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민발의한 공공병원 설립 조례안은 본회의에 오르지도 못한 채 다음 회기로 넘겨졌다.

이날 본회의에서 민주노동당 김미라, 김기명 의원이 일방적인 조례안 심의 보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본회의 심의를 요구하였음에도 김 의장이 산회를 선포하자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민 50여명은 본회의 무효를 주장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주민들은 회의 절차를 무시한 시의회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해 본회의장을 점거한 채 즉각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시의회는 경호권을 발동, 공권력을 투입시켜 해산작전으로 맞섰으나 충돌을 우려한 경찰이 10분만에 물러나면서 별다른 마찰은 발생하지 않았다.

▲ 본회의장 농성을 풀고 시의회 청사를 나가고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연행하기 위해 정문 봉쇄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경찰
ⓒ 서상일
하지만 주민들이 자진 해산하기로 하고 본회의 무효와 시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이날 오후 4시30분 본회의장에서 나오자 청사 앞마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김미라 의원 등 31명을 강제 연행됐다.

경찰은 이날 연행자들을 시내 4개 경찰서에 분산 수용하여 기물파손과 업무방해죄에 대해 조사한 뒤 보강조사가 더 필요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30명에 대해서는 이날 밤 늦게 모두 석방했다.

성남시립병원 설립 범시민추진위 공동대표 이재명 변호사는 "이대엽 시장의 뜻을 추종하는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이 공모하여 주민의사에 반하여 날치기로 본회의를 무산시킨 것은 원천적으로 불법이고 무효"라고 규정하고 의회 해산운동과 함께 한나라당 낙선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날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압 작전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오른쪽 아래쪽이 민주노동당 김기명 시의원
ⓒ 서상일
김기명 의원도 "이의 제기를 했는데도 의장이 일방적으로 산회를 선포한 것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에 의한 의회폭력이며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규정하고 "빠른 시일 안에 재회의를 정식으로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윤광열 의원은 "심히 유감스럽다. 대통령도 탄핵하는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서 "존중되어야 할 주민발의 조례안에 대해 의회에서 신중하게 다루지 못해 지역 주민들에게 송구스럽다"며 조만간 재회의 요구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한나라당 유철식 의원은 "모든 안건에 대해 심의를 하기 위해 본회의장에 들어갔지만 방청석 주민들이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더이상 회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웠다"면서 "설립취지가 순수하다면 시립병원 설립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이날 본회의장 방청석 분위기는 너무 거칠고 험악했다"며 날치기 의사진행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한편 본회의장 공권력 투입과 관련 시의회 사무국은 "오전 10시에 열리기로 했던 시의회 제114회 임시회 2차 본회의가 주민들의 본회의장 농성으로 열리지 못해 경호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성남시립병원 설립 추진 배경

지난해 7월과 9월 인하병원(450병상)과 성남병원(250병상)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인구 55만명이 살고 있는 수정구와 중원구에는 2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은 중앙병원(292병상) 한 곳만 남게 됐다.

비교적 부유층이 거주하는 분당지역에는 분당재생병원, 차병원, 서울대분당병원 등이 있어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이 많은 수정구와 중원구에는 대형병원들이 잇따라 문을 닫아 의료공백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수정·중원지역의 응급의료체계 공백과 주민 불편이 가중되면서 이 지역의 의료공백 해소와 건강권 확보를 위해 지난해 성남시민모임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나서 시립병원 설립을 위한 범시민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이들은 주민발의로 공공병원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해 12월 수정·중원지역 등 24개 동별로 추진단을 구성하여 시립병원 설립 조례제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이들은 보름만에 1만8595명의 주민 서명을 받아 12월 29일 시립병원 설립 조례제정 청구서를 성남시에 접수했다.

▲ 성남시 공무원들이 25일 오전부터 나와 조례안 통과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농성을 지켜보고 있다
ⓒ 서상일
성남시의 입장은 무엇인가

성남시는 시민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립병원 설립에 대해 ▲만성적인 운영적자 ▲전문인력 확보의 어려움 ▲예방의료 분야에서의 보건소 기능과 중복 ▲민간경제의 위축 ▲타당성 검토 선행 실시 등의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입장이다.

양인권 성남시 부시장은 "시립병원을 설립하게 되면 시의 재정적인 부담이 늘어날뿐 아니라 전문 의료진을 확보하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며 "더욱이 공공부문에 대한 민간의 위탁 경영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민간영역을 공공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 부시장은 "시민단체가 보건소가 있는데도 굳이 기능이 중복되는 시립병원만을 끝까지 고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시에서는 특정인이나 특정 정파의 논리를 편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시립병원 설립 운동에 주력으로 참여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이번 4월 총선에서 입게될 정치적 이익을 한나라당 소속인 이대엽 시장이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범추위 공동대표 이재명 변호사는 "시립병원 설립은 지난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이대엽 시장의 공약사항이고 또한 성남시민 절대 다수가 원하고 있다"면서 "그런데도 성남시와 시의회가 시립병원 설립 조례제정을 무산시키려는 것은 조례제정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반사적 이익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시립병원의 운영적자와 관련 "연간 10억원 미만으로 추정되는 운영지원비(적자)는 1조3200억원에 달하는 시 예산규모와 비교할 때 결코 부담이 되지 않는다"며 "여기에 적자의 주원인이 적정진료와 서민진료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이는 사회복지 지출의 일부로 봐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의료공백 해소를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시민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약속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수준인 공공의료 비율 30% 확보와 빈곤계층의 의료복지를 위해서는 공공의료기관의 확대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립병원은 설립 목적 자체가 돈벌이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병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상대적으로 의료보호 환자, 진료 소외계층, 무의탁 환자를 포함한 저소득 시민에 대한 의료보장과 지역사회 공공의료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의료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립병원 설립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상주인구 96만명인 성남시에 지자체가 운영하는 종합병원급의 공공의료기관이 한 곳도 없으며 ▲모든 의료시설이 민간에게 내맡겨진 상황에서 이대엽 성남시장이 선거공약으로 성남시립병원 설립을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연행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시민들이 경찰버스 앞에 드러누운 채 육탄저지에 나서고 있다
ⓒ 서상일
반면에 공공부문의 영역을 가능한 민간부문으로 위탁하는 것이 기본입장인 성남시는 대학병원을 유치하거나 오는 31일 개원 예정으로 있는 예일병원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예일병원은 외과, 신경외과 등 응급의료에 필수적인 전문 분야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시립병원을 건립하기로 한 이대엽 시장의 선거공약과 관련 양인권 부시장은 "시장은 시민으로부터 시의 예산에 대한 집행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이라며 "공약을 했든 안했든간에 돈을 투자해서 손실이 예상된다면 안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립병원 설립 조례안 처리에 대한 전망

현재 성남시의회 41명 시의원 가운데 공식적으로 찬성입장을 밝힌 의원은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전원, 민주당 소속 의원 대부분과 한나라당 소속 의원 2명을 포함 18~20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대엽 시장이 조례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밝히고 있는데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시의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여기에 공개투표를 실시할 경우 조례안이 통과될 것을 우려, 시의회가 최근 회의규칙을 개정하여 비공개 무기명 전자투표 방식을 도입한 것도 전망을 어둡게 하는 복병이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으로선 가결이든 부결이든 조례안 의결에 따른 정치적인 부담을 의식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본회의 상정을 반대하거나 해당 상임위에서 심의 보류 결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건 자체를 자동 폐기토록 하는 방안을 채택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시민단체에서는 본회의에 상정되기만 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표결방식을 거수나 기립 등 공개투표 방식을 선택할 경우 통과를 확신하고 있다.

범추위 공동대표 이재명 변호사는 "찬성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의원이 최소 18명인데, 여기에 3명만 더 찬성을 하거나 찬성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의원 가운데 6명 이상이 불출석한다면 가결된다"며 "한나라당 소속 의원과 분당지역 의원 대부분이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찬성의견을 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 변호사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수정·중원지역의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도 결국은 시민의 뜻을 따라 찬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는 시민들의 요구가 너무 절박하고 강경하며, 이대엽 성남시장 공약한 사항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오는 5월로 예정되어 있는 시립병원 설립 주민발의 조례안에 대한 성남시의회의 처리 결과에 따라 현재 지방공사의료원 주민발의 조례제정 운동을 펼치고 있는 여수시 등 다른 자치단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