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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국립묘지 유영보관소. 4.19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근간이며, 민주주의를 향한 청년정신의 표상이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글: 이병한 노경진 기자
사진: 노순택 기자



학교가 들썩인다. '바위처럼' 노래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일어나 율동을 시작했다.

"바위처어럼 살아가보자아 이히∼"

4월 18일 4·19혁명 기념일 하루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 3500여명은 '4·19기념 구국대장정'을 개최했다. 4월 17일에는 성균관대, 국민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등에서 비슷한 행사를 열었다. 해마다 있는 연례행사. 21세기 한국의 대학생은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미완의 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유리 4·19 묘역까지 그들과 같이 뛰었다.

4월 18일 오후 1시 고려대학교 민주광장. 화창한 날씨에 바람도 알맞게 불어 붉은 깃발이 눈부시게 물결쳤다. 학생들은 과·동아리 등 단위마다 예쁜 웃옷을 맞춰입고 있었다. 깃발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팔십삼, 팔십사…" 그때 연단에 선 사회자가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갑자기 이제까지 세던 만큼의 깃발이 또 일어섰다. 깃발 세기를 포기했다.


들썩이는 학교, 21세기 대학의 4·19

3500여명의 학생들은 오후 2시가 지나서야 교문을 나섰다. 그들은 대형 남북 단일기와 '김위원장 답방' 'NMD TMD반대' '대우자동차 공기업화' '일본교과서 반대' '모집단위 광역화 반대' 등의 적힌 24개의 만장을 앞세웠다. 멀리서 보기에 투쟁의 열기가 가득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때 한 여학생이 다가와 웃으면서 유인물을 하나 건네줬다.

- 몇학번이에요?
"…01학번인데요."
그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 그럼 80….
"82년 생이요."
- 82년 생이면 4·19가 일어난 한참 후에 태어났는데 어떤 생각으로 달리기에 참가했어요?

가뜩이나 수줍음을 타던 여학생은 쭈뼛쭈뼛하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얼른 대열에 합류했다. 이름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국문과 깃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과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건네준 유인물을 펼쳐보니 '시민여러분, 김대중 정권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4·19 기념 달리기에 참가한 많은 학생들은 반 이상이 새내기인 01학번이었다. 이들은 보통 82년, 81년 생.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이후에 태어난 이들에게는 그보다 20년 전에 일어난 1960년 4·19는 41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멀다. 많은 새내기들이 국문과 여학생처럼 머쓱해 할 뿐 대답도, 이름도 잘 알려주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왜 뛰는가"라는 질문에 맨 앞에서 만장을 들고가던 01학번 남학생은 "4·18정신을 계승하려고"라고 말했다. 그 옆에 있던 학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하나도 없다, 정부가 하는 꼴이 다 그렇다"고 답했다. '노학연대'라는 붉은 머리띠를 두른 01학번 김제형(이학부) 씨는 "4·18 달리기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거리에 연신 선전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작은 피켓을 들고 있는 01학번 김태환(지리교육학과) 씨는 "대우사태 비디오를 봤는데 너무 충격적이고 놀랐다"고 답했다.


같은 시각, 3500명이 수유리로 떠난 학교안

학생들이 떠난 민주광장은 한산했다. 오후 3시30분, 텅 빈 민주광장을 뒤로하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던 두 학생에게 다가갔다. "왜 4·18 달리기에 가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에 대화가 시작됐다.

"사실 1학년들은 축제 의미로 참가하는 거지."(유승찬, 동양어문 3)
"전 총학생회가 좀 이 행사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4·18정신 계승이니 하면서 미국반대, 김정일 답방 성사 등을 외치지만 1학년들 대부분은 그것에 공감하지 않거든요.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재미있게 뛰는 신입생들에게 총학생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오세창, 경영 2)
"그래, 그런 면이 있지. 또 완주하는 것에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다른 곳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하철 타고 먼저 돌아오기도 하고."(유)
"이만 가봐야겠어요. 지금 버스타고 가면 4·19묘지에 도착할 수 있겠죠? 후배들하고 얘기도 해야하고."(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오씨는 뒤늦게 수유리로 향했다. 41년 전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달리고 있는 대열과는 달리 학교 안에서는 새내기보다는 선배들을 만나기가 더 쉬웠다. 그들이 달리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다. 도서관 앞에서 만난 김동수(94학번, 경영 4) 씨는 저학년 때는 달리기에 참가했지만 올해는 취직 준비로 바빠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예전보다 마라톤에 참여하는 학생 숫자가 많이 준 것 같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취업하기 힘들고 삶에 여유가 없어서 고학번들의 참여가 저조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역시 도서관 앞에서 만난 김영석 씨(98학번, 경영 2)는 또다른 경우였다. 그는 한 번도 4·18 달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 왜 참가하지 않았나?
"그냥 달리는 게 싫었다."
- 4·19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4·19의미나 계승, 이런 것에 별로 관심 없다."


나는 왜 뛰나, 또는 왜 안 뛰나

고려대 총학생회장 김지은(법대 4) 씨는 "4·19 본래 정신은 지성인으로서 당시를 압박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항거이고 청년학생들이 억압을 벗어나려는 정신이자 움직임"이라면서 "올해 우리들이 항거할 것은 2000년에 조성된 통일 흐름을 가로막는 미국 부시행정부와 대우차노조에 대해 폭력진압을 한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일본 우익단체들의 역사왜곡"이라고 말했다. 그는 달리기 내내 트럭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4·19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거리에서 학생들은 계속 구호를 외쳤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들여다보면 현재 각 운동진영에서 제기하는 내용이 거의 총망라 돼있었다.

"서민에만 고통전가 구조조정 거부한다"
"신자유주의 전파자 김대중을 반대한다"
"한반도 평화위협 NMD를 반대한다"
"대우차 노동자 정리해고 철회하라"
"4·18정신 계승하여 국가보안법 철폐하자"

ⓒ 오마이뉴스 노순택
구호의 수준은 "김대중 정권 퇴진시키자"는 등 어느 집회 못지 않게 과격했다. 달리기 중간에는 거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의 허수아비와 대형 일장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표면적인 과격함에 비해 참가자들의 긴장도는 낮았다.

수유리 묘역까지 뛰어가기까지 육교 3개를 지났다. 육교가 나타날 때마다 학생들은 과나 동아리의 깃발을 들고 그 위에 올라가 흔들어댔다. 육교는 순식간에 깃발부대에 점령됐다. 심지어는 영업하는 PC방에 들어가서 창문으로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 달리기가 아닌 킥보드도 등장했다. 여기저기 유인물을 나눠주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거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들에게 4·19 기념 달리기는 하나의 축제에 더 가까웠다.


4·19 41주년, 신화와 축제로

올해 4·19 기념 달리기에 성균관대 학생들은 작년보다 200여명 줄어든 500여명이 참가했다. 성신여대와 동덕여대는 50∼60명이 참가했다. 연세대, 서울대, 서강대 등 일부 대학들은 사정상 행사를 대폭 축소하거나 기획하지 않았다.

41년이 지난 2001년, 대학가에 4·19는 더 이상 살아있는 현재가 아니었다. 긴 세월만큼이나 이제는 신화와 축제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4월 18일 수유리까지 학생들과 같이 뛰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축제'였다. 출발 전 흰 옷에 색동띠를 두르고있는 풍물패 01학번 성상훈(식품자원경제학부) 씨는 마치 "축제같다"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 왜 참가하게 됐는가.
"재미있을 것 같다. 축제같다."
- 김주열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 마산에서 시체로 떠오른 사람이다. 어제 과에서 나눠준 소책자에서 봤다."
- 4·18정신의 현대적 계승이라며 여러 가지 구호도 외친다.
"잘 모르겠다. 정신 계승도 모르겠고 정치적인 것은 잘 모르겠다."
- 수업은? 다음주는 중간고사인데.
"수업은 다 휴강이다. 1학년인데 마음껏 놀아야하지 않겠나."

학교 안 대자보에는 60년 당시 고대 4·18 선언문이 적혀 있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 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1960년 고대 4·18 선언문중 일부)

그 앞에서 조용하게 되물었다. 4·19가 신화와 축제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21세기 한국의 20대. 이제 그들은 확실히 '행복한 세대'인가.

교정에서 만한 한 92학번 졸업생은 "왜이렇게 타성에 젖어 행사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예를 들어 대우자동차 폭력진압 사태에 항의하는 침묵행진이라도 벌이는 것이 훨씬 4·19의 의미를 현재 되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메고 4.19묘역을 찾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생들. "4.19는 젊은이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영원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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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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