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수첩>의 PD들은 지금 자리를 잃었다. 프로그램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작가들마저 일시에 모두 해고되고 말았다. 소통과 합의, 시대정신과의 공감을 내세우던 <피디수첩>은 설 자리를 빼앗겼다. 사진은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마친뒤 김재철 사장의 면담과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을 당시.
유성호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들려오는 제작 현장의 모습은 완연히 달라 보인다. 기획단계서부터 마찰이 빚어지고, 아이템 결제가 거부되는 빈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한미FTA, 한진중공업 등 논란이 많았던 기획들은 권력이 불편해할 만한 아이템들이고, 방송이 되면 외압에서도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궁금하다. 전후관계를 분명히 알고 싶다. 그리고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그 사실을 시청자에게 알려주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문제에 등 돌리고 목소리 높이기 이전에 진중하게 검토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검증에 검증을 거듭해서 불편부당하게, 누구로부터도 책잡힐 일 없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도록 힘을 모아주는 것 말이다. 내가 몸담았던 <피디수첩>은 그랬다. 논란이 예상되는 아이템이어도 사전에 기획을 폐기하거나, '이건 안 된다, 하지 마라'라고 데스크로부터 검열을 당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경찰의 가혹 수사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PD와 나는 그가 당했던 고문의 정도를 어떻게 영상화할까 의논하다가 크로키화로 그려보기로 했다. 한두 장의 스틸 컷이 아니라, 20여 을 촬영 편집해서 움직임의 효과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편집본을 시사하던 팀장이 이것을 걸고넘어졌다. '한두 장의 그림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장치를 써야겠느냐'는 입장이었다. 승강이 끝에 스틸 컷이 확정되고 방송은 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데스크와의 마찰은 이런 정도의 수위가 전부였던 것 같다.
서로 간에 소통과 합의, 그리고 시대정신에 공감하고자 하는 자존심, 이는 <피디수첩>이 뿌리를 내리고, 오늘날까지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게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이 20년 후 지금은 모두 사라진 것인가.
내가 사는 세상을 밝게 만든다는 자부심당시, 취재내용에 대한 조율보다 더 힘들었던 건 사실 열악한 제작 환경이었다. 네 명의 PD와 작가 두 명이 조를 이뤄 PD는 2주에 한 편, 작가는 매주 한 코너씩 20분 분량을 소화해야 했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PD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 역시 한 주 방송분을 제작하면서 다음 주 아이템까지 동시에 챙겨야 했다. 말 그대로 강행군. 기획과 구성, 편집과 대본 작업까지 마치면 다음 주 방송이 코앞에 닥쳐온다. 그러다 보니 8~9회 정도 연속으로 방영이 될 즈음엔, 제작진 입에서 먼저 '어디 한 번쯤 결방되는 일 없을까' 푸념 아닌 푸념을 주고받기도 했다.
얼마 후 PD 인력은 3주, 4주 간격으로 충원되고, 작가도 2주에 50분 한 편씩을 담당하게 됐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사건의 원인을 심층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그 일정에 맞춰 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강한 노동 강도를 필요로 하는지.
내게 <피디수첩> '종신작가'로 일해보자는 제안이 온다면 분명 손을 휘저을 것이다. 떠날 때 몸 성하게 잘 추스르고 나오면 다행이라며 후배들에게도 충고도 했으니... 그럼에도 꼬박 6년을, 매번 새로운 <피디수첩>을 만들어내는 데 기꺼이 동참했던 까닭은, 내가 사는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22년을 이어오면서 <PD수첩>을 거쳐 간 수많은 PD와 작가들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PD와 작가는 제작과정 전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관계다. PD가 지휘해야 할 부분이 있고, 작가들이 더 세세하게 챙겨야 할 부분들이 있다. 이 두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프로그램은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다. 경험이 쌓여 숙련되면 될수록 좋을 것이다.
그런데, PD들은 지금 그 자리를 잃었다. 프로그램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던 작가들마저 일시에 모두 해고되고 말았다. 절차와 명분의 부당함에 대해 벌어질 논란을 예상 못 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작가들을 전원 방출해버린다는 것은 <피디수첩>이 아예 빈 공간으로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나름의 셈법이라고 할 수밖에.
멈춰서 있는 <피디수첩>, 해답은 프로그램 '정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