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일간 진행된 MBC노조 파업이 끝난 뒤 사측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PD수첩 작가 6명을 전원 해고시킨 가운데,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마친뒤 김재철 사장의 면담과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지난 1970년 협회가 설립된 이후 최초로 드라마, 예능, 교양, 라디오 등 모든 부분의 방송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PD수첩 작가들의 전원복귀와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했다.
유성호
찰랑거리던 긴 생머리를 상큼하게 자른 학생이 다가온다. "어, 머리 잘랐네. 실연의 후폭풍?" "아뇨. 개강도 다가오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여대 선생인 내가 개강 무렵 마주치는 학생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우리는 가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고, 주머니를 털어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분위기 쇄신'이라는 말은 그동안 이런 상황에 주로 쓰는 일상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고락을 같이 해온 PD수첩의 작가 전원을 해고하면서 MBC의 한 간부가 처음에 그 이유를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한국 방송사에 전대미문의 오욕을 남기면서, 방송 제작의 한 축인 작가들의 밥줄을 끊고 자존심을 짓밟으며 한 표현치고는 참으로 개념 없고 저열하다.
후배작가로부터 PD수첩 전직 작가들의 릴레이 기고에 동참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고민이 깊었다. 방송현장을 떠난 지도 벌써 7년이 넘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15년을 몸담았던 MBC는 밉든 곱든 친정이나 다름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함께 부대끼며 PD수첩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왔던 선배이자 동료였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PD수첩 22년 역사 가운데 6년 10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작가로서, 길거리로 내몰린 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고 잘못됐다 말하는 것이 지식노동자들의 소임이라면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서 있는 학자로서의 길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PD수첩 작가들 편향적이라 해고?... MBC가 그렇게 허술한가MBC 사측이 밝힌 PD수첩 작가 전원 해고의 '진짜' 이유는 그들이 불편부당성과 중립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공정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파업에 앞장섰던 PD들을 해고하고 비제작부서로 내몰던 명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나로서는 최근 PD수첩의 분위기나 제작과정을 면밀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사측이 내세운 명분이 곧 공영방송이라는 MBC가 얼마나 허술한 조직인지, 그 실상을 만천하에 스스로 폭로하는 자충수를 둔 꼴이 됐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자뻑'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언제부터 일개 PD가, 일개 작가가 프로그램의 전체 방향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제작 시스템이 되었단 말인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사 조직에는 엄연히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라는 과정이 존재한다. 팀장과 국장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뉴스를 제작하는 보도국이나 PD수첩과 같은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부서에서 게이트키핑 기능은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일개 PD의, 일개 작가의 개인적인 편향이 그대로 방송 프로그램에 반영되었다면, 공영방송 MBC의 게이트키핑 기능은 사실상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PD나 작가가 아닌 팀장이나 국장에게 먼저 직무유기의 책임을 묻는 것이 누가 봐도 타당하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정확한 단어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부하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한 고객을 찾아가 계약을 파기한 건축사무소 소장(장동건 분)은 회사의 손실을 염려하는 직원에게 "그건 내 일이야, 내가 너보다 월급 많이 가져가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일 해결하라고 그런 거야…"라고 말한다.
지위와 권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방송사가 일선의 제작인력보다 팀장이나 국장에게 더 많은 임금과 대우를 하는 것 역시 그동안의 기여도 있겠지만 그가 안고 가야 할 책임에 대한 대가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자신이 바람막이가 돼 보호해야 할 후배PD들이나 비정규직 작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칼을 쓰는 것은 수치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작가들, '좌편향 투사'가 아니라 상식적인 이들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