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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을 씌워 놓은 고 유한숙(74) 할아버지의 밀양 '시민 분향소'에 16일 오후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손을 잡고 건강부터 먼저 물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을 하고 밝게 웃는 그는 오히려 다른 주민들을 걱정했다.

윤여림(75)씨다. 한국전력공사가 밀양 송전탑 공사를 재개한 직후인 지난 10월초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그다. 서울 아산병원과 창원 파티마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처음으로 이곳 분향소부터 찾은 것이다. '암'과 싸우는 그는 송전탑과도 싸우고 있다.

유한숙 할아버지는 밀양 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다 지난 2일 밀양 상동면 고정리에 있는 집에서 농약을 마신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난 6일 사망했고, 유족들은 '송전탑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장례를 미루었다.

유족과 주민들은 지난 8일부터 영남루 맞은편 밀양교 옆 인도에 분향소를 설치해 놓았는데, 천막·컨테이너도 설치하지 못하고 비닐로 덮여진 곳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인 윤여림(75)씨가 병원에서 투병생활하다 퇴원한 뒤 처음으로 16일 오후 영남루 맞은편에 있는 고 유한숙 할아버지의 시민분향소를 찾아와 손희경(79) 할머니의 투쟁 이야기를 들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인 윤여림(75)씨가 병원에서 투병생활하다 퇴원한 뒤 처음으로 16일 오후 영남루 맞은편에 있는 고 유한숙 할아버지의 시민분향소를 찾아와 손희경(79) 할머니의 투쟁 이야기를 들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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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에서 윤씨는 마침 찾아온 천주교 수녀들과 함께 모여 앉아 할머니들의 투쟁담을 듣기도 했다. 주민들은 추운 날씨를 버티기 위해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 놓았는데, 할머니들은 그 속에 다리를 넣은 채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송전탑 반대 투쟁의 상징'이기도 한 손희경(79) 할머니가 경찰서 조사 받으러 간 이야기를 길게 했다. 손 할머니는 "경찰관이 누가 주민 대표냐고 묻길래, 주민 모두가 대표다고 했다"며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내 재산 모두를 빼앗아 가듯이, 송전탑 때문에 땅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는데 모두 나서 막고 있는데 모두가 대표 아니냐"고 말했다.

윤씨는 손 할머니 옆에 앉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투쟁담이라서 그런지 내내 웃는 모습이었다.

127번 철탑 움막 농성장에 무덤 파기도

윤여림씨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산에 있는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 127번 철탑 현장에 있는 움막을 지켰던 주민이다. 한전이 10월부터 공사 재개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그는 지난 9월 한 달 동안 움막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는 움막 바로 앞에 무덤을 파기도 했다. 윤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죽을 각오로 송전탑 공사를 막아내겠다고 다짐하며 무덤을 팠던 것이다. 윤씨는 지난 추석에도 집에 가지 않고 움막을 지켰다.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는데, 최근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는 움막이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곳곳에 움막을 설치해 농성하고 있는데, 최근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소재 127번 철탑 현장에는 움막이 새로 만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며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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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함께 움막농성하는 주민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송전탑 찬성측 주민이 지난 여름 새벽에 낮을 들고 찾아와 윤씨를 위협했고, 그때부터 불안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몸져눕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움막을 지키고 무덤을 파는 작업을 벌이며 과로한 탓에 윤씨는 지난 9월 말 엿새 동안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남우(71․평밭마을)씨는 "윤여림 어르신은 과로에다 스트레스로 병이 더 깊어졌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한전은 강도다"

분향소에서 만나 윤여림씨는 "수술이 잘 돼서 괜찮다"며 "병원에 있으면서 송전탑 공사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과 곽빛나 간사와 전화통화를 하는 등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유한숙 할아버지의 소식을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에서 보내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알았다는 것. 그는 "고인은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면서 "처음에 문자메시지를 보고 놀랬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끝까지 살아서 함께 싸웠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인 윤여림(75)씨가 병원에서 투병생활하다 퇴원한 뒤 처음으로 16일 오후 영남루 맞은편에 있는 고 유한숙 할아버지의 시민분향소를 찾아와 밝게 웃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인 윤여림(75)씨가 병원에서 투병생활하다 퇴원한 뒤 처음으로 16일 오후 영남루 맞은편에 있는 고 유한숙 할아버지의 시민분향소를 찾아와 밝게 웃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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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숙 할아버지는 "765kV 송전탑 때문에 농약을 마셨다"는 유언은 했지만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윤여림씨는 "고인이 마지막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고, 정신이 없다보니 유서를 써놓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와 한전에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단번에 "정부가 강도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남을 재산을 빼앗으면 강도 아니냐"며 "지금 밀양은 송전탑 때문에 땅값이 형편없고, 팔려고 내놓아도 살 사람이 없는데, 내 재산을 그렇게 만든 정부와 한전이 강도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는 국민의 재산을 지켜줄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를 다하기는커녕 재산을 도둑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강도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고 덧붙였다.

윤씨는 "당분간 집에서 몸조리 하며 지낼 생각이고, 송전탑을 막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함께 온 부북면 주민들과 함께 분향소에서 머물다가 다시 위양리 움막 농성장으로 향했다.


태그:#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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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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