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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속내도 저런 해맑은 노란빛이었으면...
▲ 생강나무 우리 아이들 속내도 저런 해맑은 노란빛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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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 나오다가 한 여학생과 마주쳤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밝게 인사를 나눈 뒤끝에 스치듯이 제 귀에 들려온 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늘 해맑아요?”

뒤늦게야 아이가 한 말을 알아듣고 뭔가 대꾸라도 해주고 싶어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몇 걸음을 지나쳐버린 뒤였습니다. 발걸음을 빨리 해서 뒤쫓아 가서라도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너무도 분주하고 정신없이 보내버린 학기 초여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터라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해맑다는 말, 참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한참 해맑아야할 어린 제자가 오십대 중반인 중늙은이 선생님에게 던진 말로서는 좀 부적절해보이기도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요? 사실은 수업시간에도 그런 상황, 곧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을 자주 만나곤 합니다. 제가 좀 심했는지 모르지만 여자반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가 꼭 소년과 할머니가 사는 집 같다.”

그런데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듣고서도 아이들이 분개하기는커녕 너그러운(?) 할머니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복도에서 만난 그 아이도 그런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을 지닌 아이입니다. 상당수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일종의 조로현상은 학업에 대한 흥미나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좀 단순한 진단 같지만 진단에 대한 처방을 내린 뒤에 그 추이를 지켜보면 뭔가 확연히 잡히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너 공부하란 말 안 할 테니까 학교에나 잘 다녀.”

일견 심각하고 복잡한 내막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처방을 소홀히 한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처방이란 공책 정리를 하게 한다든지, 숙제를 꼭 해오게 한다든지, 던져진 질문에 꼭 대답을 하게 한다든지, 한 권의 책을 권해준다든지 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소박한 교육행위를 말합니다.

진정한 교육개혁이란 교육의 순수성, 곧 아이들의 해맑음을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 수선화 진정한 교육개혁이란 교육의 순수성, 곧 아이들의 해맑음을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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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교육행위를 교사의 일이 아닌, 교사에게 불필요하게 부가되는 짜증스런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이 공책정리를 하고, 숙제를 해오는 것을 학생의 일이 아닌 짜증스런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지요. 학생과 교사의  짜증의 연대, 혹은 짜증의 악순환이라고나 할까요?  

아이들이 공책정리를 하지 않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이의 손실입니다. 그 손실이 장기적으로 지속됨으로써 아예 공부를 포기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교사가 막아주어야지요.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교사가 흥분할 일은 아닙니다. 

“너 숙제 해오란 말 들었어 안 들었어?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중요한 것은 속도와 화법입니다. 이런 교사 중심의 화법으로는 아이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어렵습니다. 변화의 주체가 없는데 아이가 변화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겠고요. 뿐만 아니라, 교사는 교사대로 격양된 감정의 발산으로 야기되는 피로감을 감당하기도 어렵겠지요.  

며칠 전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어문장 몇 개를 칠판에 적어놓고 따라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두 번 세 번 기회를 주어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자리에 세운 뒤에 다시 문장을 따라 읽게 했습니다. 그래도 몇 아이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리에 앉게 하고 그 아이들은 그대로 자리에 세워둔 채 다시 따라 읽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마지못해 따라 읽었고, 저는 그 아이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며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날 그런 똑같은 일이 몇 번 더 반복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매번 혼이라도 날 줄 알았다가 안도의 눈빛을 보이며 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이런 감정조절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속도를 조절할 줄만 알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따라 읽으라고 할 때 꼭 따라 읽으세요. 한 번 안 따라 읽는 습관이 들다보면 계속 안 따라 읽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일 년 내내 안 따라 읽을 수도 있어요. 그것은 여러분의 손해지요. 그래서 선생님이 안 따라 읽는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읽도록 한 겁니다. 여러분이 안 따라 해서 혼을 내주려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읽는 습관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알았지요?”

아이들을 혼내줄 때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주 일상적으로 아이들을 혼내는 것은 오히려 교사의 화에 대한 내성을 키워줄 염려가 있습니다. 또한, 늘 화내고 짜증을 내야만하는 어두운 일상의 반복이 자칫 교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교사가 불행하면 아이들도 덩달아 불행해지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태그:#해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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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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