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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넌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당장 나와!"

마치 연극 대사라도 외우듯, 느닷없이 핏대를 올리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놓고는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뭔가 종잡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거나, 그것이 도가 치나져 가벼운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런 상황쯤으로 이해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아이들은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저에 대하여 그렇게 느닷없이 화를 내고 욕을 해댈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때가 첫 수업시간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아이들이 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것은 제가 칠판에 적어놓은 다음과 같은 글귀 때문이었습니다. 

'친절한 교사가 되겠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자청하여 선언해놓고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험한 말을 쏟아놓은 교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지요. 저는 청중들의 반응을 충분히 확인한 뒤에 남은 대사를 아껴가며 이렇게 천천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못해도 절대 이런 식으로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버릇없이 굴어도 친절한 말로 조용히 타이르겠습니다. 그래도 버릇없이 굴면? 그때에도 친절한 말로 타이르겠습니다. 그래도 또 버릇없이 굴면 그때는? 그때에도, 야, 이 자식아, 너 이리 나와. 너 지금 나하고 놀자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고 여러분의 인격을 믿고 또 다시 친절한 말로 타이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또 버릇없이 굴면 그때는? 그때에도…. "

내용은 진지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형식은 한 편의 코미디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똥그랗던 눈모양이 웃어죽겠다는 듯 가늘게 찢어질 수밖에요. 그 가늘어진 눈모양이 다시 동그란 모양으로 되돌아온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산책하기를 좋아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어제는 동천을 거닐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내가 교사로서 여러분을 만날 때 가장 마음에 두어야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분을 선의로 대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을 선의로 대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실망시키더라도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고 여전히 선의로 대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여러분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을 선의로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을 잡아야한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학생들에게 간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도 흔히 듣습니다. 역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일리는 있지만 그 말이 생산적인 감동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아이를 선의로 대하고, 그로 인해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동의 윤활유 없이는 그 아이의 참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교사의 선의를 악의로 갚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거나 눈에 비웃음이 가득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비웃음을 그들의 영혼에 심어준 어른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심어준 것이든, 누구의 책임이든, 그것을 환한 선의의 웃음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그 이상의 생각은 불필요하겠지요.     

혹시, 세상에 대한 비웃음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울퉁불퉁했던 저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럴만한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로 인해 마음의 상처 받은 아이가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치료를 받고 있다면 저는 그분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제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고 싶습니다.

다만, 너무 진지하지만은 않게, 가끔은 배꼽을 잡을 만큼 코믹하게 말입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좋아하고, 그런 왁자지껄함 속에서도 감동의 문맥을 읽어낼 줄 아는 신통방통한 아이들이 바로 요즘 아이들이니까요.


태그:#선의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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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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