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요즘 <어린왕자>에 푹 빠져 있습니다. 프랑스 조종사 작가로 유명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처음 접한 것은 그때가 초등학교 시절인지 중고등학교 시절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정도로 꽤 오래 전 일입니다.

하지만 정작 <어린왕자>를 눈을 반짝이며 가슴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어른이 다 되어서의 일입니다. 이태전인가는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눈길에 닿아 책을 단숨에 읽어버린 기억도 납니다.

요즘은 이른 아침마다 <어린왕자>를 만납니다. EBS 영어 프로그램인 'Read & Speak'에서 영문으로 된 <어린왕자>를 재방송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생애 통산 열 번도 넘게 읽은 책인데도 아직도 제가 발견하지 못한 샘이 책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독자로서의 무능 탓이라고 해도 좋은 것은 뒤늦게 새로이 발견한 샘에서 목을 축이는 기쁨이 큰 까닭이지요. 다음은 영어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소개해준 <어린왕자>의 한 대목입니다.  

‘What makes the desert beautiful is that somewhere it hides a well.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칠판이 가득 채워질 만큼 큰 글씨로 영어문장과 우리말 해석을 함께 써놓은 뒤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물이 아니라 오아시스 아닙니까?”

저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맞아. 오아시스가 좁은 의미로는 샘이야. 우물이고도 하고. 그럼 이렇게 해보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생각해 이 말?”

뭔가 감이 잡히기는 해도 표현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감조차 없는 것인지 사뭇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주는 것은 교사인 제 몫이었지요.  

“우리 경희가 어떤 남자를 사귀고 있는 거야. 지금 말고 조금 더 커서. 그런데 그 남자가 겉보기에 좀 형편이 없는 거야. 사막처럼 황폐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누가 봐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그런 남자인데 우리 경희는 그 사람과 꼭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경희는 그 남자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던 거지. 마치 사막에 감추어진 우물처럼 말이지. 우물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잖아. 그 우물은 사랑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어. 겉보기는 멀쩡한데 그 안에 생명의 우물이 없는 그런 사람은 곤란하잖아.”

말을 마치자 아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몇 해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그 후유증과 생활고로 인해 술을 자주 마시게 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의 욕심이 많은 가봐. 난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해주고 싶고 또 사랑도 받고 싶은데 그게 여러분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아버지가 직업도 변변치 않고 술도 많이 드시고 해서 원망을 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선생님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깊은 것 같단 말이지.”

“그거야 당연하죠."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뜻밖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일말의 섭섭함이 느껴질 만큼 아이의 표정은 차갑고 단호했습니다. 물론 그런 섭섭함이 안도의 마음으로 뒤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날 이렇게 갈무리를 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현실 때문에 비록 사막처럼 메마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누구보다도 내 아버지가 아름다운 것도 그 어딘가에 나에 대한 사랑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내 아버지를 그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고말고요.”

아무리 사랑의 욕심이 크다 해도, 이런 경우 저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마다요. 


태그:#어린왕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