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심훈의 막내 아들 심재호 선생이 아버지 묘비 곁에 서 있다. 이 묘비는 2007년12월 5일 심재호 선생이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필경사 경내에 세웠다.
▲ 심훈 묘비 심훈의 막내 아들 심재호 선생이 아버지 묘비 곁에 서 있다. 이 묘비는 2007년12월 5일 심재호 선생이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필경사 경내에 세웠다.
ⓒ 심재호

관련사진보기


구례 화엄사에서 받은 손전화

심훈
 심훈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요즘 호남의병 전적지를 답사 순례 중이다. 여행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고 하지만, 답사 여행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더욱이 일백년 전의 전적지를 찾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의병 후손을 찾기도, 그때를 증언해 줄 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의병 전적지는 대체로 산골인데 요즘은 현지에서 마을 이름이라도 물어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산촌은 매우 고즈넉하다.

여태 운전면허증도 없는 사람이 카메라, 녹음기, 책 등을 싸들고서 남의 차를 빌어 타고 다니는 일이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타고난 팔자요, 이 시대를 사는 한 글쟁이의 소명으로 알고 호남 일대를 누비고 있다.

지난 일요일(9일)은 함평에서 심남일 의병장의 후손을 만난 뒤, 다음 인물인 매천 황현 선생을 취재하고자 광양 생가와 사당을 들른 후 선생이 <매천야록>을 쓰신 구례로 갔다. 도착하니까 오후 6시 30분으로 섣달이라 그새 어두웠다. 우선 밥집에서 요기한 뒤 묵을 곳을 찾았지만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동안 숙박은 안내자인 고영준 선생의 거주지인 창평의 한 숙소였다. 궁벽한 마을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값은 쌌지만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모텔로 영 마음 내키지 않아도 별수 없이 지내왔다.

구례 읍내 다른 숙소도 그와 비슷하여 차라리 화엄사 부근 민박 촌이 좋을 듯하여 버스를 타고 갔더니 깨끔한 숙소가 있었고, 워낙 손님이 없는 때인지라 아주 싼 값에 들었다(주인 말로는 성수기가 아니고 혼자이기에 10년 전 개관 당시 요금이라고 했다).
      
여장을 풀고서 차라도 마실 양으로 찻집을 찾아 나서는데 손전화가 울렸다. 뜻밖에도 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사는 심훈 선생 막내아들 심재호(72) 선생이었다. 지난달 귀국하여 서울 사촌아우집에 머물고 있다면서 출국인사 겸 안부전화였다. 그동안 심 선생과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유작시 '그날이 오면' 을 서예가 이철경씨가 썼다.
 유작시 '그날이 오면' 을 서예가 이철경씨가 썼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심훈 선생의 유고

나는 최근 4년 동안 그분을 네 차례 만나 오랜 대담을 나누었다. 심재호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중, 1975년 긴급조치가 펑펑 쏟아지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사가 기관원들에게 검열당하자 맨정신으로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동료와 술을 마시며 지내다가 도저히 심신을 배길 수 없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심재호 선생은 미국에 간 뒤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다가 <일간 뉴욕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삼 형제 중에 막내인데, 큰형 심재건씨가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할머니는 유언처럼 그에게 "네 애비 친구가 북녘에 많이 있다. 애비는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네 큰형은 반드시 살아있다. 꼭 큰형을 찾아라"고 말하곤 했다.

심 선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두 번이나 북한에 가서 형을 만났다. 그 일로 남북의 이산가족이 자기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겨레의 아픔으로 알게 된 심 선생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앞장섰다.

1987년부터 북한을 20여 차례 방문하여 1200여 이산가족의 생사 여부와 편지 왕래,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을 이루게 했다. 그동안 정부나 언저리 사람에게 색안경을 쓴 따가운 눈총과 비난도 수없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눈총에도 꺾이지 않은 것은 혈육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04년 여름, 귀국해 나에게 전화를 주었길래 강남의 한 호텔로 달려갔다. 아버지 심훈 선생의 유작을 가지러 왔다고 했다. 사연인즉슨, 심훈 선생의 고향 당진에 심훈 기념관을 세운다고 하여 아버지의 유고를 친지에 맡겨두었으나 기념관 건립이 지지부진하다 끝내 무산돼 아버지 유고가 유실될지 몰라 찾으러 왔다고 했다. 마침 내가 찾은 날이 당진에서 유고를 찾아온 날이라서 심훈 선생의 유고를 볼 수 있었다.

유고 뭉치에는 심훈 선생이 200자 원고지에다 깨알같이 쓴 육필 원고와 신문이나 잡지에 실으려다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란 붉은 도장이 찍힌 원고,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 가장 감동 받았던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도 있었다.

심재호 선생은 조국이, 고향 사람들이 아버지 유고의 진가를 몰라주기에, 아들인 당신이 어쩔 수 없이 유고 뭉치를 들고서 해외로 떠난다고 했다. 유고 뭉치를 꾸리는 심 선생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에서 만나다

버지니아주 센터빌 심훈기념관에서(오른쪽부터 박유종, 심재호, 박도)
 버지니아주 센터빌 심훈기념관에서(오른쪽부터 박유종, 심재호, 박도)
ⓒ 박도

관련사진보기

올봄 나는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의 한 숙소에 머물면서 미국 문서기록보관청을 드나들 때, 3월 4일이 일요일이라 하루 종일 숙소에서 지내기가 무료하여 심재호 선생 댁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심 선생은 마침 2007년 3월 1일, 자신의 집에 '심훈 기념관'을 열었다고 하면서, 내가 고국에서 온 첫 번째 손님이라고 곧장 초대했다. 나를 도와준 박유종 선생 차로 버지니아주 센터빌을 찾았다.

495번 워싱턴 DC 순환도로와 95번 남북 고속도로를 1시간 남짓 달린 끝에 버지니아 센터빌 조용한 주택가에 이르렀다. 아담한 2층 집이었다. 집 안에서 차 소리를 듣고 내외가 현관문을 열며 반겨 맞았다.

동행 박유종씨가 백암 박은식 선생 손자라고 하자 심재호 선생은 더 없이 반가워했다. 심훈 선생도 독립운동가로서 한 때 북경의 우당 이회영 댁에 기숙하면서 단재 선생과 교유하기도 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드나들면서 백암 선생을 사사하기도 했다고 선대의 인연을 말했다.

집안에는 온통 심훈 선생의 사진과 관련 사진, 원고, 책자들로 꽉 찼다. 그동안의 사정을 어슴푸레 아는 나에게 심재호 선생이 입을 뗐다.

"책장과 원고함,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던 아버님의 유품들을 모두 꺼냈어요. '심훈 기념관'이 꼭 클 필요는 없지요.”

곁을 지키던 부인 설도섬(71)씨가 보충 설명을 했다.

소설 <상록수> 육필 원고
 소설 <상록수> 육필 원고
ⓒ 박도

관련사진보기

"아버님이 남긴 작품의 원고가 거의 다 남아 있어요. 그 까닭은 복사기도 없던 그 시절, 아버님이 원고를 쓴 뒤 후일을 대비해서 신문사나 잡지사로 보내기 전에 한 벌 따로 써두셨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사셨기에 젊은 날 일찍 돌아가셨나 봐요."

하지만 그렇게 쓴 원고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흩어져 버렸다. 심재호 선생이 <동아일보> 기자가 된 이후 그런 사실을 알고는 십수 년 동안 수소문해서 다 찾았다고 했다.

서너 평 되는 서재는 온통 심훈 선생의 흔적으로 가득 찼다. 정면 벽에는 낡은 사진과 유고, 훈장으로 도배되었다. 심재호 선생은 흰 장갑을 끼고서 궤짝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빛바랜 원고 뭉치를 꺼냈다.

'심훈시가집',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통곡 속에서', 시와 산문의 원고와 장편소설 원고들이 쏟아졌다. 또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기리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마지막 절명의 원고까지 나왔다. 심훈 선생이 1936년에 운명하셨으니 모두 70~80여 년 전의 원고들이다.

"이 원고들은 겨레의 자산으로, 언젠가는 겨레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 선생은 아버님의 유고들을 다시 보관함에 차곡차곡 넣으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알고서 미국 시카고 대학과 일본 도쿄대학에서 이 유고들을 기증해 달라고 백지수표로 제의하지만 어찌 넘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심훈의 육필 원고 보관함과 유품들
 심훈의 육필 원고 보관함과 유품들
ⓒ 박도

관련사진보기


겨레의 자산인 국보급 문화재

나는 가까운 곳이라면 달려가련만, 구례에서 다음날 안내자를 만날 약속과 답사 일정이 꽉 차 있었다. 피치 못할 내 사정을 말하자 곧 심 선생은 당신도 출국일이 촉박하다면서 심중에 있는 사연을 토로하였다. 이번 귀국은 두 가지 일을 하고자 왔는데, 그 첫 번째는 아버지 심훈 선생 묘소 이장의 일이요, 두 번째 일은 아버지 유고를 조국에 돌려드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묘소 이장은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필경사 경내에다 잘 모시고 거기다가 예쁜 묘비석까지 당신 손으로 세웠는데, 다른 하나 심훈 문학관 건립은 여태 지지부진하다면서 울먹였다. 이제 나이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유고들은 겨레의 자산인바 겨레의 품으로 돌려드리고 싶은데, 기증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였다.

필경사 옆에 심훈 문학관을 지어 영구 보관 전시토록 기대하고 있으나 당진군에서는 예산 탓인지 아무개 기업체에게 이를 짓게 하여 기부체납하기를 바라는 모양인바 당신은 기업체에게 양도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하였다.

나는 심 선생의 얘기를 들은 뒤, 내 소견을 말씀드렸다. 꼭 당진 필경사로 장소를 정하지 말고, 심훈 선생의 모교(경기고)나 대학교에 기증하는 방안이 어떠냐고 말씀드리자, 미처 생각지 못하였지만 그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이 유고들을 소중히 보관 전시해 줄 마땅한 기관이 나서면 고려해 보겠다고 하였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육필 원고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육필 원고
ⓒ 박도

관련사진보기

심훈의 유고에는 '治安妨害 削除(치안방해 삭제)'라는 붉은 잉크의 스탬프와 '삭제'하라는 붉은 선이 거의 매 쪽 시뻘건 '沈熏詩歌集(심훈시가집)',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痛哭(통곡) 속에서' 시와 산문의 원고와 장편소설 <상록수> 등의 원고들로 일제 강점하 독립투사며 시인이자 작가의 육필 원고로, 가히 국보급 문화재다.

만일 이 원고를 조국이 외면해 외국의 기관으로 흘러간다면 뒷날 우리나라가 다시 찾아오기는 무척 힘들 것이며, 수십 배의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규장각 도서도 여태 반환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 역사학자는 지금 우리 사회가 국민소득은 올라갔지만, 오히려 인문이 죽어버렸다고 개탄하였다. 나라 전체가 온통 경제에 빠진 느낌이다.

이즈음 대통령 선거에도 경제문제가 판치고 있다. 그러자 인문이 빛을 잃어버리고 온갖 사이비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국민소득만 올라간다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물질적인 삶의 질과 문화적인 삶의 질이 함께 향상되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낳은 유명 작가 원고도 제대로 간수치 못하면서 남의 나라 노벨문학상을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낚고자 하는 난센스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심훈 육필 원고를 기증받고 싶은 기관은 이메일(jaihoshim@hanmail.net, jayl0320@naver.com)이나 전화(1-703-815-2098 미국)로 연락하십시오.



태그:#심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