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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만난 심재호씨

▲ 심훈 선생의 셋째 아들 심재호씨
ⓒ 박도
지난 2월 7일 저녁 6시 30분, 워싱턴 애난데일 가에 있는 한 한식집에서 백범 암살 배후 진상을 추적하는 우리 일행(권중희씨와 필자)의 방미를 환영하는 워싱턴지구 동포 모임이 열렸다. 40여분의 동포들이 오셔서 만리타향 먼 길을 찾은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내빈 중,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의 아드님 심재호(68)씨를 소개받을 때, 그 반가움이란 마치 중학교 1학년 때 심훈 선생의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올린 편지>를 처음 배울 때의 감동이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분이요, 몇 만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소설 <상록수>에서 채영신이 청석골 학원 낙성을 앞두고 죽어갈 때의 그 애잔함, 시 <그날이 오면>에서 조국 광복에의 간절한 염원 등 심훈 선생으로부터 받은 뭉클한 감동은 한글 세대면 모두가 공감하리라.

귀국 전 꼭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마침 사위 서혁교씨가 장인 어른 심재호씨를 모시고 숙소로 오셨다. 마땅히 나이 어린 사람이 댁으로 찾아뵈어야 도리인데 결례를 했다고 사죄를 드리자, 당신도 아직 이곳 길눈이 어둡다면서 필자의 마음을 편케 해 주셨다.

"내 고향은 세 곳인 셈이지요"

-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1936년 4월에 태어나고 아버님은 그해 9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 고향은 어디신가요?
"제가 태어난 곳은 아버님의 집필실이었던 충남 당진의 필경사(筆耕舍)입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태어나시고 사신 곳이 서울 흑석동이고,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이 안산 사람이라 그곳에서도 연고가 있다고 주장하니 고향이 세곳인 셈이지요.(웃음)"

- 아버님이 독립 운동가셨지요.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4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후 졸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경기고등학교 교사(校史)에는 경기 출신 독립운동가 제1호라고 자랑삼아 내세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많이 준, 그 흔한 명예졸업장도 없어요. 자식으로서 좀 섭섭하죠."

- 심훈 선생은 작가로, 기자로, 영화인으로 다방면에 출중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희 할머님 윤씨이십니다. 그분은 조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이십니다. 저도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왜 이민을 오셨습니까?
"1974년 그해 겨울은 유신 시절로 긴급조치가 펑펑 쏟아지던 '겨울공화국'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는데, 맨 정신으로 도저히 살 수 없었던 때라 매일 술 먹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망가져서 도저히 배길 수가 없어서 혼자서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그냥 현실에서 탈출하는 마음으로 훌쩍 떠나왔어요. 솔직히 저는 그제나 이제나 투사는 못돼요. 제 양심으로는 그때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떠났던 겁니다."

북 형님 상봉 계기로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앞장

심재호 선생은 미국에 온 후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다가 일간 뉴욕신문사를 창간하기도 했다. 당신은 삼형제 중에 막내인데, 큰형 심재건씨가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북으로 갔다.

할머니는 유언처럼 "네 애비 친구가 북녘에 많이 있다, 애비는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네 큰형은 반드시 살아있다, 꼭 큰형을 찾으라"고 말하곤 했다.

심재호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두번이나 북한에 가서 형님과 상봉을 했다. 그 일로 남북의 이산가족은 당신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겨레의 아픔으로 알게 된 심재호씨는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앞장섰다.

▲ 남북 동포의 징검다리가 된 늘 푸른 나무 심재호씨
ⓒ 박도
1987년부터 북한을 20여차례나 방문하여 1200여 이산가족의 생사 여부와 편지 왕래,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을 이루게 했다. 그동안 정부나 주위로부터 색안경을 쓴 따가운 눈총과 비난도 수없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눈총에도 꺾이지 않은 것은 혈육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 선생은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북한 방방곡곡을 헤맸다. 사천령 고개도 넘고, 백두산 기슭에도 오르내렸다. 그 일로 집 한채 이상의 돈을 썼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어렵게 만난 이산가족들이 상봉 후, 제발 만남 자체를 쉬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고 했다.

선생은 조국의 통일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시면서, 남북한 동포들이 자꾸 만나면 저절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며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민족의 동질성 회복보다 이질성 극복이 더 급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노래 한곡 부르면 끝납니다"라고 강조하셨다. 심 선생은 우리 동포들은 수천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민족이라는 점에서 동질성 회복을 쉽게 낙관하셨다.

심재호 선생은 지금 북한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며 그 가난이 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위협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 가난을 조용히,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사는 형이 가난한 아우 좀 돌봐주면 안 됩니까? 쌀 몇 됫박 퍼주면서 요란을 떠는 것은 형제답지 않지요. 상대의 자존심까지 구기는 동정은 형제애가 아닙니다."

그날이 오면

심 선생은 남북의 물꼬가 터지고 뱃길, 기찻길이 열리는 이 즈음에는, 무엇보다 남북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필요하다면서 민간 차원의 교류가 더없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조국에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조국의 내일을 낙관한다면서 당신은 순수한 민간 통일꾼으로, 이 시대의 한 휴머니스트로 남고 싶다고 하셨다.

대담을 마치면서 필자는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마치 심훈 선생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늘 푸른 나무 '상록수'는 여태 시들지 않고 먼 이국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드렸다.

- 고국에서 여생을 마감할 생각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그래서 몇 해 전에는 서울 수유리에다 거처까지 마련했어요. 그런데 몸이 아프고 아이들이 모두 이곳에 있기에 할 수 없이 돌아왔지요. 사실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조국과 고향을 모두 잃게 했거든요.

이제는 한국과 미국도 가까워졌으니 형편이 되면 서울에다 방을 하나 얻어 두고, 이곳에도 거처를 마련해 두면서 남은 삶은 서울과 이곳을 오가며 지내고 싶어요."

백범 암살 배후를 가리기 위해 미 국립문서기록청에 드나드는 필자 일행에게 좋은 일 한다면서 굳이 점심을 사겠다고 필자의 손을 끌면서 믿음직한 아들(사위) 차에 올랐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 심훈<그날이 오면>


아버지 심훈 선생이 기다린 '그날'은 조국 해방의 '그날'이었지만, 아들 심재호씨의 '그날'은 조국통일이 이루어진 '그날'이리라.

점심 식사 후 멀리 사라지는 당신의 뒷모습을 필자는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서울에서 워싱턴에 옮겨진 상록수가 곧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싱싱하게 자랄 '그날'을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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