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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작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
ⓒ 박도
명작 <상록수> 산실, 필경사

▲ <상록수> 육필원고
ⓒ 심훈기념관
충남 아산시 둔포면 산항리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둘러본 뒤 곧장 서해안으로 달렸다. 조금 달리자 바다가 보였다. 21세기는 서해안 시대라더니 바다에는 큰 화물선이 오가고 갯벌이 그새 공장지대로 변하여 소문이 낭설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동행 임형과 송악면 안섬포구에서 점심으로 회 한 접시와 매운탕을 든 뒤, 거기서 멀지 않은 심훈 선생의 <필경사(筆耕舍)> 로 갔다.

10여년 만에 필경사를 다시 찾았는데 그새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교통이 아주 좋아졌다. 송악나들목에서 1km라 승용차로 눈 깜짝할 새 이르렀다. 이곳이 바로 명작 <상록수> 산실이다.

영신은 그 생기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데,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이가 빠진 듯이 띄엄띄엄 벌려 앉은 교실 한 귀퉁이가 빈 것을 보지 않으려고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누구든지 학교에 오너라."

창 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족 매달려서, 담 안을 넘어다보고 있지 않는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고 기어오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영신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칠판을 떼어, 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창 앞턱에다 버티어 놓고, 아래와 같이 커다랗게 썼다.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에 매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하는 것 같다.


▲ 심훈이 상록수를 동아일보에 연재할 때 매일 우체국으로 원고를 배달했던 부곡리마을의 지인실씨
ⓒ 심훈기념관
이 글은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한 부분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국어 고1 교과서에 수록되었는데 최근에는 중학국어 2-2에 실려 있다. 이밖에도 중학국어 2-2에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 시와 <감옥에서 어머님에게 올리는 글> 옥중 편지도 실려 있다.

나도 중고등학교 시절 이들 작품들을 모두 배웠으며, 교단에 선 이래 30여년 간 이 세 작품을 일백번 이상 학생들에게 가르쳤기에 아직도 전문을 욀 듯하다. 이들 세 작품은 각기 그 장르에서는 최고봉이라고 이를 만큼 빼어난 작품이다.

고즈넉한 심훈기념관

▲ 심훈 선생
ⓒ 심훈기념관
이렇듯 심훈은 장르를 뛰어넘는 천재작가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영화에도 입문,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하기도 하였다. 심훈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영화 <장한몽>에서는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등 전천후 예술인으로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심훈은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 만세에 참가하여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퇴학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북경 등지에서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 애국지사와 교유하기도 하였다.

1934년 <직녀성>을 조선일보사에 연재한 고료로 필경사를 지은 뒤 이 글방에서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1936년 그의 나이 36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 우승에 감격하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신문 호외 뒷면에 남긴 채 불귀의 객이 되어 먼 길을 떠나셨다.

심훈이 간 지 70년이 지났지만 필경사 옛 집필실과 그의 문학은 고스란히 남아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충남 당진군에서는 이곳을 향토 문화유적지로 잘 관리하고 있으나, 평일인 탓인지 방문객이 가뭄에 콩 나듯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유원지나 해수욕장, 먹을거리 축제장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지만, 항일유적지나 명작의 산실 같은 문화 유적지는 여태 발길이 뜸하다.

▲ 일본 이와테 현 한 호텔 계단에 전시된 겐지의 작품 <눈 건너기> 한 장면
ⓒ 박도
몇 해 전 일본 기타도호쿠 지방의 이와테 현을 갔더니 온통 그 고장 출신인 시인이요,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 시비와 유품사진들로 뒤덮였다. 심지어 호텔에도 한편에 겐지의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고, 계단의 손잡이에도 겐지 작품의 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방문객에게 자기 고장 작가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문화를 전수해준 역사로, 그들보다 문화의 역사가 훨씬 더 깊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문학에서 두 명의 노벨상 작가를 배출하고 있다. 작품만 좋다고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 그 작품을 사랑하는 국민이 없이 어찌 세계적인 작품이 될 수 있겠는가. 일본인들은 그네들이 가장 많이 쓰는 천원권 지폐의 초상마저도 나쓰메 소오세키라는 소설가를 새기고 있다.

▲ 심훈 선생의 흉상 앞에서
ⓒ 박도
심훈의 유작 진품은 지금 국내에 없다. 심훈의 유작 진품은 미국 버지니아 센터 빌에 있는 심재호(심훈의 3남) 씨의 2층 '심훈기념관'에 있다.

"이 원고들은 겨레의 자산으로, 언젠가는 겨레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재호씨는 그곳을 찾아간 나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필경사를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고즈넉한 기념관 전시실, 방문객이 오든 말든 친절한 안내는커녕 내다보지도 상관치 않는 관리인, 이런 풍토에 어찌 당신 아버지의 육필 원고를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기대하리오.

위대한 작가는 아무 곳에서나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를 사랑하는 풍토에서만 나온다.

인문이 죽어가는 나라에 '정의' '양심' '진리' '문화' 이런 낱말이 한낱 사치품으로, 겉치레만 하는 이들의 장식품으로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일까?

▲ 필경사 옆에 있는 심훈 기념관
ⓒ 박도

태그:#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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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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