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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살이 찌고 배가 나온 경찰이 우리 쿠페 칸으로 들어왔다. 경찰은 안드레이의 여권을 보고 나서 돌려주더니 나에게도 여권을 요구했다. 난 여권을 꺼내서 내 사진이 붙어 있는 부분과 비자가 붙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다시 돌려받으려 했지만, 경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내 여권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경찰은 곧 내 여권에서 카자흐스탄 출입국 카드를 꺼내더니 그곳에 거주등록 도장이 없다면서 그것을 문제 삼았다. 카자흐스탄의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거주등록은 따로 안 해도 된다. 나는 그렇게 말했고 안드레이는 경찰과 나 사이에서 통역을 하느라 바빴다. 난 입국시에 출입국카드에 받은 두 개의 도장을 가리키면서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카드에 도장 두 개면 거주등록을 따로 하지 않아도 돼. 카자흐스탄의 법이 바뀌었거든."

안드레이는 이 말을 러시아어로 경찰에게 말했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때부터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휴대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몇 통하고, 안드레이는 경찰과 얘기해보더니 경찰이 자기 상사와 통화를 했는데 거주등록 문제가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거주등록이란?

거주등록이란 시민권을 소지하지 않은 외국인이 해당국가 내에 체류할 때 그의 거주지를 해당 지역 관청에 등록하는 것을 말합니다. 러시아를 포함해서 구소련 지역에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제도입니다. 해당 외국인의 입국후 며칠 이내에 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거주 등록은 해당 기간 동안 단 1회만 하면 됩니다.

거주 등록은 보통 '오비르'라고 하는 지역 내무부 산하 부서에서 하게 되어 있지만, 관광객의 경우 대부분 호텔에서 거주 등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거주등록이 필수이고 구소련 지역은 국가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원칙적으로 해야하지만 출국시 검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카자흐스탄은 3개월 이내 체류시 거주등록을 안해도 되고, 키르키즈스탄은 한국인의 경우 거주등록이 필요없습니다.
/ 김준희
나는 한우리 민박집의 명함을 꺼내 보이면서 안드레이에게 다시 말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우선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안드레이였다.

"이 명함이 알마티에서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거든. 여기에다 전화 한통 할 수 있게 경찰에게 말해줘."

하지만 경찰은 자신의 휴대폰으로는 전화를 할 수없다고 한다. 속으로는 조금씩 화가 나고 있었다. 분명히 거주등록은 안 해도 된다. 이 경찰은 자기나라의 바뀐 법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괜히 외국인 여행자에게 트집을 잡고 싶은 걸까?

내 사정을 모르는 안드레이는 자기의 출입국카드를 꺼내서 거기에 찍힌 커다란 거주등록 도장을 가리키며 나에게도 이런 도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했다. 안드레이는 다시 경찰과 무슨 얘기를 하더니 이 문제가 'administrative crime'이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경찰은 웃으면서 자기의 두 손을 들어서 수갑을 채우는 시늉을 하고 있다. 수갑? 설사 정말 거주등록 문제가 나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 때문에 외국인 여행자에게 수갑을 채우나?

화가 났지만 달리는 열차 안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화 한 통이면 해결이 될 수도 있을 문제이지만 경찰은 무슨 이유인지 전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경찰이 무얼 원하는 걸까. 괜히 꼬투리 잡아서 돈을 요구하는 걸까. 그렇더라도 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니 돈으로 해결할만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난 다시 한우리 민박집의 명함을 보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사장님이 그랬거든. 입국카드에 도장이 두개면 거주등록을 안 해도 된단 말야. 카자흐스탄 법이 바뀌었어."

하지만 이 말을 안드레이가 제대로 이해할리 없어 보였다. 발하쉬에 머무는 동안 정식으로 거주등록을 하고 도장을 받은 안드레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내가 이상해 보일지 모를 일이다. 안드레이는 다시 경찰과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온갖 생각들을 떠올렸다. 안드레이가 말했다.

"경찰한테 너가 지금 중앙아시아 여행하고 있는 여행자라고 말했어. 그리고 여행 후에 신문에다가 여행기를 쓸 거라는 얘기도."

난 이 말에서 감을 잡아 다시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허풍을 쳐보기로 한 것이다.

"맞아. 난 여행 끝나고 나서 신문에 여행기를 쓸 거야. 카자흐스탄의 문화와 음식과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카자흐스탄 경찰에 대해서."

안드레이는 이 말을 다시 경찰에게 러시아말로 옮겼다. 경찰은 말을 듣고 나서 날 바라보았다. 나도 경찰을 바라보았다. 이 경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의 거리.
ⓒ 김준희
경찰은 잠시후에 웃으며 일어나더니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아무튼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아서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리고 경찰은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뭐라고 말했어? 왜 그냥 간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경찰이 그냥 눈 감아준 것 같아"

내 말이 효과를 본 것일까. 아니면 원래 문제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나에게 트집을 잡아 본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정말 나에게 거주등록 문제가 있는 걸까. 머리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아무튼 경찰이 그냥 갔기 때문에 우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뿐, 1시간쯤 후에 또 다른 경찰이 우리 쿠페 칸으로 들어왔다. 이 경찰도 내 여권과 출입국카드를 보더니 거주등록이 안되어 있다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거의 말이 필요 없었다. 난 어차피 경찰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안드레이가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안드레이는 경찰과 뭔가를 한참 이야기 했고, 경찰은 날 바라보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난 경찰은 안드레이에게 날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을 하더니 열차에서 내렸다.

"너 아스타나에 가거든 거주등록 해야 한데."

경찰이 가고 나서 안드레이가 나에게 말했다. 난 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미칠 노릇이다.

"거주등록 필요 없다니까."
"이봐 준. 내말 들어봐. 첫 번째 두 번째 경찰은 이 문제를 그냥 눈감아 준 거야. 하지만 언제 세 번째 경찰이 나타날지 몰라. 지금까지는 잘 넘어갔지만 넌 여전히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거야."

안드레이는 바뀐 법을 모를테니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안드레이의 입장에서는 내 말보다는 경찰의 말을 더 믿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심이 생겨났다. 거주등록 문제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 정말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왜 경찰들이 그냥 갔을까?

경찰들의 태도를 봐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괜히 트집 잡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다. 정말 나에게 거주등록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바뀐 법을 경찰들이 모르거나. 둘 중에 어떤 것이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스타나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경찰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스타나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나의 기대대로 기차에서는 더 이상 경찰을 만나지 못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안드레이와 인사를 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아스타나 역은 수도의 역답게 크고 깨끗한 모습이다. 알마티 역보다 잘 정돈되고 깔끔한 외관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작은 호텔을 찾으려고 돌아다녀 보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모텔 수준으로 보이는 곳의 가격이 하룻밤에 1만팅게, 8000팅게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팅게는 카자흐스탄의 화폐단위. 1달러는 약 130팅게). 결국 민박을 구하기로 하고 역 앞에서 호객을 하는 사람과 손짓발짓으로 흥정을 했다. 작은 아파트 한 채를 2일 간 빌리기로 했다. 가격은 하루에 3000팅게.

비싼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파트의 상태는 예상보다 안 좋았다. 작은 아파트는 침실과 주방,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파트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원룸같은 그런 공간이다. 그런데 바로 뒤가 아스타나 역이라서 거의 하루 종일 기차역에서 나오는 소음을 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그리고 내부도 낡아있었다. 욕조에는 녹이 슬어있고 벽지는 벗겨져 있고 주방에는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있다.

▲ 아스타나 기차역.
ⓒ 김준희
짐을 풀고 나서 씻고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한 여자가 러시아어로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난 영어로 말했다.

"난 러시아말 몰라요. 영어로 말해요."

하지만 여자는 계속 러시아어로 떠들고 있다. 짜증이 나서 끊으려고 하는 순간 반복되는 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제부쉬까(여자)'

그러자 한순간에 상황이 파악되었다. 맙소사. 이 사람은 나에게 여자가 필요하지 않냐고 말을 하고 있다. 동시에 한우리 민박집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호텔에 들어가면 전화가 와. 여자 필요하지 않냐는 전화."

이 말이 사실이었구나. 발하쉬는 작은 도시라서 그런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 수도인 아스타나에 오니까 짐을 풀자마자 이런 전화를 받게 되었다. 나도 서툰 러시아어로 말했다.

"제부쉬까 니예트(여자 필요없어)"
"니예트?"
"니예트, 오케이?"

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주방에서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려는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문에 붙어있는 구멍으로 밖을 보니까 웬 여자가 서있었다. 경계심이 들기는 했지만 난 문을 열어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 여자도 나에게 여자가 필요하지 않냐는 말을 반복했다.

"니예트!"

문을 닫고 들어와서 침대에 앉았다. 왜 자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발하쉬를 떠나면서부터 계속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날 피곤하게 하고 있다. 난 정리를 하고나서 쉬기 위해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난 그냥 무시하고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두드리다 지치면 그냥 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지 안에 사람이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두드리는 투가 아니다. 빠르고 크게 반복되는 그 소리는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난 밖으로 나가보았다. 밖에는 경찰이 서 있었다.

경찰은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오더니 화장실과 주방을 훑어보고 나서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의 이불을 걷어보고 침대 밑을 들여다보고 발코니까지 열어서 보았다. 난 다시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 경찰은 내가 여자를 불러서 함께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다. 여자가 숨을 만한 장소를 골라서 뒤져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나도 화가 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왜 함부로 들어와서 자는데 방해해?"

난 경찰을 문쪽으로 몰면서 말했다. 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 경찰은 약간 수그러진 태도로 무슨 말을 했지만 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난 러시아말 모르거든. 그러니까 영어로 얘기하던지 아니면 나가!"

난 이 말을 계속하면서 밖을 가리켰다. 러시아어로 뭐라고 한참을 떠들던 경찰은 결국 밖으로 나갔고 난 다시 문을 잠그고 침대로 돌아왔다. 외국에 와서 경찰에게 언성을 높여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지만, 지금의 심정으로는 어쩔 수 없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 때문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이다. 이것이 끝이길 바란다. 오늘이 가기 전에 또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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